600.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 기린봉 아파트 뒷산.
내가 태어나기 100년전 1858 1월 11일 그는 강화도령 철종이 임금노릇 하고 있을때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인천(仁川)이씨이고 상인(常人) 출신으로 조선 말기에 흥해군수,
나주감목관, 육군 참령(參領) 등을 지냈으며, 조선말시대에 전라북도관찰사,
일제강점기에는 전라북도장관을 해 먹고 1916년 3월 9일 뒈젔다는 인물 이두황의 묘를 찾았다.
이늠의 무덤을 찾아 가려면 조금 걸어야 한다

그늠의 무덤은 전주시 중노송동 기린봉 아파트 뒷산에 있다

그의 묘 앞에는 여러개의 푯말이 서 있었다

모두가 저주 일색이다
그늠의 친일행적과 행실이 아주 나쁜 관계로 나도 입에서 욕을 내밷기로 했다



그의 묘지 봉분에도 역시 저주의 푯말이 얹혀 있다

비석높이만 2m가 넘는다.
글씨가 지워진 부분은 후손이나 친일 관련자들의 이름은 묘비에서 모두 삭제된 상태이다.

죽어서도 저주받고 있는 인물 이두황은 누구인가.?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가담하기도 한 그는
훈련대장인 우범선(禹範善)과 함께 병사를 데리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일본 낭인들을 도왔다.
이 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아들 이진백(李鎭白)과 함께 부산으로 도주해서 일본놈의 집에 숨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일본불교가 어떤불교인지는 몰라도 일본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는 그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초토영군(剿討營軍)에 임명되어 동학농민군을 때려잡는 일을 하게 된다
수많은 동학군들을 살륙한 이두황은 김개남(金開南)이 이끄는 농민군을 목천 세성산에서 격파하여
공주로 북상하던 전봉준(全琫準)의 동학군과 합세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패퇴하는 동학군을 추격하여 해미·유구·노성·논산 등지에서 많은 동학군을 살육하고,
전주성에 재집결한 농민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다시 빼앗았다.
1907년 8월 귀국해서 9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특사로 사면되고 나서는
전라북도관찰사 겸 전라북도재판소 판사로 전임되어 의병 진압에 앞장섰다.

그 인간이 어케 생겼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바로 이넘이 이두황이다.

1951년 차길진의 부친인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은 이두황의 묘를 찾아내고
부관참시를 하기위해 묘를 파보았으나
이두황 부관참시는 불가능했다. 당대로서는 드물게 화장을 해 묻은 것이다

이두황의 묘를 포함한 임야 4만 제곱미터가 아직 후손들의 소유라고 하는데 그 후손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토지대장을 열람하면 알수 있겠지
이두황 그 작자는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는데 그의 장례에 수천명의 인파가 모였다고 한다


씨없는 수박을 만들어 낸 육종학자 우장춘박사의 아버지인 우범선과 함께
이두황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놈들의 앞잡이였다
'가고. 보고知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602. 금산. 천내리 용호석 (0) | 2022.12.20 |
---|---|
601. 부여. 백제로 가 보았다 (0) | 2022.12.18 |
599. 괴산. 우암 송시열묘 (0) | 2022.12.11 |
598. 논산. 명재 고택 (0) | 2022.12.11 |
597. 하동. 이현상 (0) | 2022.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