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176. 언양. 자수정 동굴.

한유(閑裕) 2018. 4. 21. 07:13

176..

* 울산 울주군 상북면 등억알프스리 산 23.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기도 한다 자수정을 좋아하는 사람이 찾기도 한다.

세상살이 복잡다난해서 간이 뒤집힌 사람도 찾는다.

물론 일반 관광객이 대부분이지만서도......

경남 언양에 있는 자수정동굴은 자수정 광산의 폐갱도를 이용하여  조성한 인공 동굴 관광지이다.

자수정동굴은 개미집처럼 미로로 연결된 동굴은 총연장 2.5km, 넓이는 약 16,529m²의

연평균 온도가 12~16℃이며 여름에는 추위를 겨울에는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동굴이다.

 

동굴로 들어간다. 성류굴이나 온달동굴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재수 좋으면 자수정 부스러기라도 혹시 주울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져본다.

물이 고인듯한 곳도 흐르는 동굴도 있다.

 

연못같은 동굴도 있다.

동굴안에서 배를 타고 가는곳도 있다.

 

 

휴식공간도 있다.

작은 소품으로  꾸며진곳도 있다.

자수정광산이었음을 실감하게 하는 자수정이 있다.

동굴에서 생활하는 원시인도 있구...........

 

 

 

토함산 석굴암. 군위의 석굴암. 무척산의 석굴암도 분명 아니다.

지하갱도 깊숙히 법당이 있다. 부처님이 거하시면 법당이 아닌가.

지하갱도에서 합장을 하게 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입을 깨끗이 하는 정구업진언은 저절로 나왔고 참회한다는 말도 했다.

지하에 흐르는 물길을 보며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혹시 황천은 아닌지....... 동굴속에 흐르고 있는 지하수의 물길이 황천일수도 있다는 생각..........

사람이 죽으면 황천길로 간다고 했다 대기권 바깥인 천상으로 가게될지  흔히 황천길이라는 지하수의 흐름을 따라갈지..... 

사후에는 내가 가야하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49제가 끝나는 순간 누구의 자궁을 통해 다시 지구로 귀환할수도 있다

 

지은 업보에 따라.............. 환생할수도 있다는 야그이다.

존재는 인간이나 동물, 어떤 경우에는 식물이 될 수도 있다.

환생에 대한 믿음은 아시아 종교와 철학의 중요한 특징이지만, 신지학 같은 현대 종교운동뿐만 아니라

고대 중동의 몇몇 종교(예를 들면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신비 종교), 마니교,

영지주의, 원시종교의 종교적·철학적인 사상에서도 나타난다.

원시종교는 공통적으로 복합영혼을 믿는다.

영혼이 입이나 코를 통해 육체에서 빠져나갈 수 있고, 새·나비·곤충 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남아프리카 벤다족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잠시 무덤 근처에 남아 있다가

새로운 거처 또는 다른 육체(인간·포유류·파충류)를 찾는다고 믿는다.

고대 그리스 종교 가운데 오르페우스 신비 종교는 영혼이 육체로 태어나기 전에

미리 존재하고, 육체가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있다가 나중에 인간이나 다른 포유류의 육체로 환생하며,

결국에는 탄생과 죽음의 윤회에서 풀려나 과거의 순결한 상태를 되찾는다고 주장한다.

플라톤도 환생하는 영혼을 믿었다고 하는데.........

환생을 믿는 주요종교에는 아시아 종교들, 특히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들이 주로 환생을 이야기 한다.

모두 '카르만'(행위)이라는 공통된 교리, 즉 인과법칙에 따라서 내생이 정해진다는 

야그에 따르면 사람이 현세에서 하는 행위가 내세에서 그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쁜일 하지말고 살생을 하지말고 남을 미워도 하지말고 남을 괴롭히지 말고

남의 마음에 상처를 만들지도 말며저 자신의 마음에도 상처를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업보가 되고 축적이 된다는것이 카르마이다.

뿐만 아니고 상대를 위한다고 하는일이 상대가 식상해한다면 그 일을 중단해야한다

그래서 사는것이 어렵고 대인관계도 어렵다.

모든것이 적당해야 다음 생에 적당한 모습으로 환생도 할수 있는것이리라.

삶은 타이밍이고 죽음도 타이밍이다. 타이밍이 맞지 않은 생은 허우적 거리는 인생이 되고 피곤한 삶이 된다

믄가를 해야할 시기를 놓치면 기회는 점차 줄어든다

공부할 시기도 놓치면 다시 공부할 시공간을 얻기가 어렵다는것이다. 사랑도 선행도 수행도 다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변하지 않고 실재하는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며, 영혼들의 윤회는 믿는다.

정신적·육체적 요소와 순간에서 순간으로 변하는 상태의 복합체로서, 육체·감각·지각·충동·의식 등

5가지 '스칸다'를 지니는 영혼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지만,

죽은 사람들의 카르만은 그대로 살아남아 모태에서 '비냐나'(의식의 씨앗)가 된다.

사람은 고행과 명상을 통해 철저히 수동적인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탄생과 재탄생의 순환에서 이탈해 나와 욕구가 소멸된 상태인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해탈........을 말하는 것이리라

 

자수정 동굴속에 불등이 달려 있다. 동굴을 밝히는 등이 아니라 마음을 밝히고자 하는 등이리라.

 

 

 

다른장식이 없다.

 

死者의 書 ......'바르도 퇴돌'이라는 티베트의 경전이 있다.

세상에는 '티벳 사자의 서'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1927년 옥스퍼드 대학의

에반스 웬츠가 영어로 번역하여 책이 나오자 엄청난 반향이 일어났다.

흔히들 오해를 하는데 이 책은 단순히 장례식 절차나 사후 세계에 대한 설명서에 그치지 않는다.

삶의 밑바탕 진리를 아주 뚜렷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해 주는 티베트 불교 최고의 경전이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쯤 인도 나란타 대학 출신의 현자요 밀교의 대가인

'파드마삼바바'가 티베트에 가서 티베트 말로 쓴 것이다.
그는 백 권이 넘는 책을 썼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보고 티베트 여기저기에 숨겨 놓고는

몇몇 제자들이 뒷날 다시 태어나면 보물찾기 하듯 그 책들을 찾을 수 있도록 이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심어 주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65 권이 찾아졌는데 '바르도 퇴돌'은 그 책 중의 책이다.
'바르도'란 '둘 사이'란 뜻으로 사람이 죽은 다음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머무르는

중간 상태를 이야기하는데 기간으로는 49일로 알려져 있다.

'퇴돌'이란 '듣고 놓여나기'다. 그래서 이 경전은 '죽은 다음 중간 상태에서

듣기만 해도 영원히 자유로워지는 가르침'이라고 풀 수 있다.

심리학자 칼 융도 이 책에 큰 영향을 받고 직접 해설서를 쓰기까지 했다.

49재가 티베트 불교에서 바로 유래한 것은 아니지만 현시대에  불교 신자들은 죽은 자를 위하여 49제를 지낸다

매 7일마다 7차례 재를 지내므로 칠칠재라고도 한다.

흔히 황천길로 갔다라는 말이 있다 황천은 저승을 뜻하기도 하고 지하샘물을 뜻하기도 한다

자수정 동굴에서 본 이 지하수가 황천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수 있나.

어쩜 인지못할수도 있는 이 지하의 물흐름이 황천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인간은 죽은 후 출생의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 수차례 죽고 태어나는 식으로

7일을 여러 번 경과하는데, 그 최대기간은 49일이라 한다.

즉 사람은 죽어서 7일마다 다시 생사를 반복하다가 마지막 49일째는

반드시 출생의 조건을 얻어 다음에 올 삶의 형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49재가 사자의 명복을 비는 의식으로 정착되고 중시된 것은 이런 관념에서 연유한다.

이 49일 간을 중유 또는 중음이라 한다.

49재는 사자의 중유 상태 즉 중음신이 좋은 세계로 재생하도록 기원하는  불공 의식이며,

이 날에 이르기까지는 좋은 결정이 이루어지도록  7일마다 경을 읽고 재를 올린다.

 

티베트에서는 스님들이 주검이나 영정 앞에서 이 경전을 소리 내어 읽어 준다.

날짜가 지남에 따라 차례로 세 편을 읽는데 투명한 빛 나타나는 환영들 환생 직전의 사건등이다.

한국식으로는 스님이 임종에 자리하거나 시신 옆에서 불경을 읊는 시다림이 있는데 이미 숨을 거두신 분인데도

그 때 분명히 내 말을 듣고 있더라고 확신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의 미래는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살아온 전 생애보다도 죽는 마지막 순간과 그 다음 49일 동안 죽은 자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다음 생이 더 결정 된다고 한다.

이 때 죽은 이에게 용기를 주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좋은 길잡이가 되는 것이 이 '바르도 퇴돌'이다.
하지만 이 경전의 대단한 점은 이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사후에 보게 되는 그 모든 빛들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마음이 비춘 그림자임을 밝힌 점이다.

왜 누구에게는 연꽃 든 보살님이 나타나고 누구에게는 날개 달린 천사가 찾아오는가?

삶도 자기 자신이 만들고 세계도 내가 창조하는 것임을

'연꽃 위에서 태어난 자'는 이 '사자의 서'에서 밝히고 있다.

 

황천수일수도 있고 황천길이 될수도 있는 이곳 지하 자수정 동굴에 부처님이 계시더라.

앞산이 북망산천이고 대문밖이 저승이라는 말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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