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경남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조금 큰 절을 찾아가면 그 절집을 창건한 인물이 누구란걸 밝히고 있다
여수 돌산의 향일암도 원효스님이 창건했다고 했고 해수 관음보살상 ㅡ 앞에는 원효스님의 좌선대가 있다
나는 관음보살님과 원효스님과는 무척 이나 많은 관계가 있구나 생각했다
관음성지인 홍룡사도 원효대사께서 관세음 보살님과의 친견설화가 전해지는 관음성지이다
무설전에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이 봉안되어 있고 백의관음이 봉안된 관음전이 있다
입구에는 가홍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절집규모가 아담하고 대찰에 비해 규모가 적지만 위엄이 있으면서도 마음을 참 편하게 해주는 절집이었다
스님들의 수행공간이고 공부하는 곳이다
반바지 차림의 아가씨가 요렇게 다니면 수행에 지장이 생긴다. 절대 정숙이 요구되는 장소이다
대나무의 굵기가 두손으로 감싸쥐어야할 정도로 굵었고
무설전에는 천수천안 관세음 보살님을 봉안하고 계신다
무설전의 주련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으로 두루 살피시니..... 어찌 허물을 감추리.
주련의 미적감각을 흠뻑 즐겨본다 무설전의 주련들이다
시간은 주련을 이렇게 퇴색하게 했다
글씨한자 한자가 품위만땅이다.
대웅전의 벽화
홍룡이다
두마리의 룡이 지키고 있었는데 조각솜씨가 대단하다
지극정성에는 남자나
여자가 따로 없다.
대웅전의 주련들인데 제작시기가 그리 오래되지않은듯 했지만 글씨체에 힘이 넘첬다.
글자들을 확대하여 찍어 두었다 (내겐 자료가 된다)
난간석의 문양도 한컷
백의관음전과 홍룡폭포를 가기위해서는 수정문(守正門)을 지나야한다
특이하게 산신과 나반존자가 함께 모셔져 있다
공부를 해본다
독성각은 독성(獨聖)을 모신 곳이니, 이는 부처님이 없는 세상에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홀로 수행하여 깨달은 이를 말한다.
독성을 연각(緣覺)이라고도 한다. 독성은 스승 없이 혼자서 깨친 독각(獨覺)의 성자이다.
즉 독수선정(獨修禪定)하여 도를 깨달은 자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봉안하는 것이 통례이다.
본래 독성은 부처님의 제자였다. 아라한과를 얻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머물다가 말세 중생의 복덕을 위하여 출현한다하여
특별히 복을 희구하는 신도들의 경배대상이 되고 있다.
흔히 칠성(칠성각)과 산신(산신각)과 이 독각(독성각)을 합쳐서 삼성(三聖)이라 한다.
우리나라 사찰 안에는 삼성각(三聖閣)이란 전각을 지어 모시고 있는 절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독성신앙에 특유의 단군신앙을 가미시켜 새롭게 수용하고 전개시켰다.
따라서 이 독성을 모신 독성각은 우리나라 사찰 특유의 전각 중의 하나이다.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을 비롯하여 후불탱화인 독성(獨聖)탱화를 모신다.
사찰에 따라서는 탱화만을 봉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료에 의하면 이 독성각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삼국.고려시대 것으로 남아 있는 전각은 없다.
대개 독성각에 단독으로 모셔지거나 삼성각 안에 칠성탱화와 산신탱화와 함께 봉안된다.
독성탱화는 수독성탱(修獨聖幀).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고도 한다.
보통 16나한탱화와 같은 구도법으로 그려진다.
독성탱화는 나무와 산이 무성한 천태산을 배경으로 그려진다.
늙은 비구가 석장(錫杖)을 짚고 앉아 있는 모습이 이 탱화의 특징이다.
하지만 때때로 동자가 차를 달이는 모습도 있다.
또 동자와 문신(文臣)이 양쪽 협시로 나타나 나반존자와 나란히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바위틈사이에.......
홍룡폭포이다 관음전 앞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남편인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니 요석공주도 필시 한번은 이 절을 왔다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젖는다
양산 홍룡사와 요석공주...... 재미있는 연결을 해본다
그 옛날 갔을때에는 낙차되는 물소리가 웅장해서 그리고 물안개가 자욱해서 선계인줄 알았더라
저 위가 궁금하더라
수량이 적어 아래로 흘러가는 물이 적다
양산 8경으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천성산 산기슭에, 관음기도도량이 있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홍룡사는 원효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당나라에서 건너 온 천명의 대중을 위해 창건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룡이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홍룡폭포에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
관음보살은 다른곳에서는 볼수 없다.
요석공주에 대한...... 홍룡폭포의 관음전 계단에서 땀을 식히면서 검색에 들어갔다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누이인 보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요석공주는
원효와 만나기 전에 김음훈(金歆運)에게 시집 갔으나 김음훈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여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소생으로 두 딸이 있었으니.........
그 중 둘째 딸이 자신의 남매인 30대 국왕인 문무왕인 깁법민(金法敏)의 큰 아들인 소명과 혼인하였으나
소명태자가 일찍 사망하여 소명태자의 동생인 정명과 재혼하였는데 그가 신문왕이다
신라왕들의 족보를 보면 대부분 근친결혼으로 이루어진다
성골이니 진골이니하는 유래가 여기에 있다
아버지는 태종 무열왕이고 어머니는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의 딸이다
그러니까 이른바 문희에게서 꿈을 사서 차후 왕비가되는 보희의 딸인것이다
요석공주는 김유신의 질녀인것이다
오빠가 문무왕이고 문무왕의 아들이 신문왕이고 요석공주의 딸이 문무왕의 왕비가 되니
가히 개족보라 할만하다
요석공주의 본래 남편은 김음훈이나 백제와 전투에서 전사하였기에 과부가 된다.
김음훈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딸은 문무왕의 큰 아들인 소명태자(昭明太子, ? ~ 665년)과
정혼자로 내정되었으나, 일찍 사망하자, 죽은 언니를 대신하여 혼인하였으나
소명태자가 얼마 뒤 병으로 사망해 과부가 되었다.
이후 소명태자의 동생인 정명태자(政明太子)와 재혼하였다
그 정명태자는 훗날의 만파식적의 주인공인 신문왕이다.
딸을 둘이나 두고 있던 요석공주와 재혼한이가 바로 원효인데 설담날의 아들이며 설원랑의 증손이다.
여기서 알수있는것은 원효대사의 속세성씨가 설씨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래서 아들이름이 설총이 아닌가.이두라는 문자를 만든이가 설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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