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음현... 지금은 산청이라는 물맑은 동네에 돌을 쌓아만든 왕릉이 하나 있더라
오래전에 만든 돌무덤인데 왕이 묻혔으니 왕릉이라 사람들이 불렀다
국가지정 사적 제214호로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기슭에 있는 이 왕능은
가락국의 제10대 임금이자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오고 있다.
무덤의 형태는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잡석으로 방형의 단을 이루면서 피라밋 모양으로 쌓아올려
모두 7단을 마련한 돌무덤이며 상면에 타원형의 봉분이 마련되었으나 일반 봉토분과는 전혀 다르다.
특이한 점은 전면 4단째에 작은 감실이 마련되어 있는 것인데 그 용도는 알 수 없다.
높이는 7.15M 이며 무덤앞의 비석,석물은 모두 후대에 만들어 세운 것이다
산음이라 불리는 산청땅. 유의태 약수터를 가려면 덕양전을 끼고 올라 가야 한다
덕양전(德讓殿)은 남 문화재자료 제50호로 금서면 화계리 화계마을 가락국 제10代왕
양왕(위 仇衡)과 왕비(위 桂花) 양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망향화를 드리는 곳이다.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19년(가락기원491년) 제10대 구형왕이 왕위에 오른 뒤
재위 11년째인 532년. 라의 침공을 받지 않고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었다.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으로 이어하여 5년후 돌아가셨다
역대 가락국 왕들이 이곳 왕산 기슭 엄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별궁인
태왕궁(太王宮,별칭으로 水晶宮)을 세워 놓고 왕족들이 자주 찾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법흥왕 19년(가락국 기원으로는 491년)으로 구형왕은 나라를 넘겨준 왕이란 의미로 양왕이라 불렸다.
구형왕은 밀양의 이궁대에서 신라 법흥왕에게 선양의 절차를 마친 뒤
낙동강을 지나 이곳 왕산의 태왕궁으로 들어와 은거하다 5년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을 인용한 “가락국2000년사”에 기록돼 있다.
이들 사료에는 또한 구형왕이 많은 백성이 화를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나라를 스스로
넘겨 주었기 때문에 훗날 그의 후손인 김유신장군 등의 삼국통일 영웅들이
신라에서 큰 유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구형왕의 아들은 무력장군으로. 무력장군의 아들인 서현은 경주의 길목을 지키는 양주
(지금의 양산 울산 동래등지)도독으로 큰 역할을 수행 했는데 서현의 부인은 진흥왕의 조카 만명으로 전해진다.
“서현”과“만명”이 바로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구형왕의 손자인 김유신은 청년시절 화랑도를 이끌고 증조부의 왕능을 지키면서
지리산 일원에서 호연지기를 키워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 명성을 드 높였다.
화계 덕양전에서 1km남짓 위에 위치한 구형왕릉은 돌무덤으로 구조가 특이한데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이 화랑으로 활동하던 청년시절 이곳에 들어와
능을 지키는 시릉살이를 하며 무예를 연마하였다
돌무덤 100여m 아래 길가에 김유신장군이 활을 쏘던 곳을 기린 사대가 세워져 있다.
개울가 비탈에.............
돌을 쌓안 만든 무덤이 하나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약 200여년전에 마을사람들이
산에 올라가서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는 길에 비를 만나 왕산사에 들러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왕산사에는 언제인가 부터 법당 들보위에 커다란 나무궤가 하나 얹혀 있었는데
누구도 그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냥 손댈수 없는것으로만 전하여 지고 있었다.
그런데 비를 피하는 일행중에 민경언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평소에 담력이 센 분으로서
주지스님과 일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궤를 내려서 열어보기에 이르렀다.
그랫더니 그 속에는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그리고 활과 칼같은 유물이 나왔고
또한 명승 탄영의 왕산사기등이 나와서 이를 고증하여 왕능을 다시 찾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왕산사지는 수정궁(가락국시조대왕 별궁지)과 같은 부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락국 양왕릉이라고 적혀 있다
국가사적 제214호인 구형왕릉은 가락국의 마지막 양왕이 영면하고 있는 능소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가야시대의 석릉으로 700만 김해 김씨들의 조상묘로 성서러운 곳이다
호능각이 보인다
아치형 돌다리를 건너서 오고간다.
석물은 모두 후대에 조성된걸로........
릉에있는 인위적으로 만든 구멍인데 무식하니 용도를 알수 없다.
무덤의 주인공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덕양전.
가락국 제10대 왕인 양왕과 왕비, 두 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양왕은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에서 생활하다 5년 후에 돌아가셨다.
그뒤 제사를 올리다 전쟁 때문에 중단되었으나 1798년부터 다시 항례를 올렸다.
광무 2년(1898)년 덕양전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30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후 1991년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전각은 가락국 제십대왕, 양왕(위仇衡)과 왕비(위桂化)양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망향화를 드리는 덕양전이다.
그 유래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가락기원 492년)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王山) 수정궁(水晶宮)으로 이어하여 5년후 돌아가셨다.
그후 향화를 계속하다가 전화로 중단되었다가 서기 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다.
서기 1898년 숭선전(김해수로왕능침)이 사액됨과 동시에 덕양전으로 개칭하여
서기 193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어 1991년 문화재 정화사업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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