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1
천장사(天藏寺)는 충남 서산에 있는 절집이다.
그 절집을 찾아서 이 길을 간다.
한 겨울에 보자기를 눌러쓴 한 여인이 천장암으로 경허스님을 찾아 왔다.
경허스님은 스님방에 여인을 들이고는 함께 한 방에서 생활을 하신다
그곳에서 한 동안 그 여인과 한방에서 머무르니 절에서는 난리가 난다
그러자 천장암이 발칵 뒤집혀... 스님들이 데모를 한다 . 만공스님까지 스님을 의심하게 된다.
'경허스님은 스님들에게 물러가라!' 명 하지만 물러갈 기세가 없자
그러자 보자기를 쓴 여인이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서 보자기를 벗자 모든사람이 경악을 한다.
여인은 얼굴이 뭉그러지고 손발이 뭉그러진 중증의 문둥이 환자였던 것이다.
스님은 문둥이 여인을 간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둥이 여인은 천장암을 떠난다
이후 스님은 자기를 이해못한 그 모든것들을 버리고 천장암을 떠난다.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甲山 웅이방 도하동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신
경허스님이 계셨다는 천장암을 가는 것이다
천장사는 칠층석탑으로 유추할 때, 고려 시대 창건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는데.
그 칠층 석탑으로 유명해진 절집이 아니다
근 현대 경허(鏡虛)[1849~1912]와 그의 제자 만공(滿空)[1871~1946]이 머물렀고
만공은 이곳에서 도를 깨쳤다 해서이고 또.
최인호(崔仁浩)의 소설 『길없는 길』로 널리 알려진 절집이다.
천장암 주차장에서 천장암으로 올라가는 사잇길이다
1903년 가을 천장암으로 돌아온 경허스님은
이듬해 7월15일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전한후 천장암을 떠났다.
이후 경허스님은 오대산 월정사, 고성 건봉사, 안변 석왕사를 거쳐
장발유복(長髮儒服. 머리를 기르고 도포를 입고)하고 북방으로 몸을 감췄다가 1912년 원적에 들었다.
따라서 천장암은 경허스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후 주석하며
혜월ㆍ수월ㆍ만공ㆍ한암 스님 등 한국불교를 이끈 선지식을 지도한 성지(聖地)이다
작은 길을 올라서니 눈에 들어오는 경허선사의 오도송이다.
경허는 연암산 천장암의 작은 방에서 1년 반동안 치열한 참선을 한 끝에 확철대오하게 되고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사람이 없구나"라고 시작하는 오도송을 짓는다.
이 천장암에서 경허의 '三月'로 불리는 수월. 혜월. 만공스님이 출가하여 함께 수행하게 된다.
제자들과 함께 천장암에서 지내다가 개심사.부석사. 간월암등지를 다녀오기도 하였는데
이 때 경허스님과 제자들간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이 바위다.
적힌글을 읽어본다.
탁발 다녀오는길이다
바랑을 맨 만공스님이 경허선사뒤를 힘겹게 따라 올라오고 있엇다
이대 갑자기 경허선사가 물동이를 인 동네 아낙에게 입을 맞추고 줄행랑을 친다
만공스님도 이 모습을 보고 기겁하여 정신없이 같이 도망을 하였다.
산길로 접어든 경허선사가 길가의 넓은 바위에 걸터 앉으면서 하신 말이다.
만공아 아직도 바랑이 무거우냐,?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명산 대찰에서 느끼는 감정과 많이 다른 느낌이 와 닫는다.
정말 고승열전에 등장하는 큰 스님들이 아니신가.?
그분들의 흔적이 고스라니 남아 있는 이 절집에 내가 둘러 보고 있다니............
이 얼마나 큰 인연인가>
겨울이라 문에는 비닐로 보온을 해놓았다.
법당 앞에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02호로 지정된 천장사 칠층석탑이 있다.
높이는 7m로 오층석탑이라는 설도 있다.
여기 이문이
글을 읽지도 못한 문맹스님인 수월스님은 법문도 하지 않았고
불교사에 변변한 기록 하나 남기지 않았지만,
수월스님은 북간도의 중생들을 위해 부단히 몸을 움직이며 시봉했다고 전해진다
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고 허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혀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 겨.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겨.
나는 순전히 ‘천수대비주’로 달통한 사람이여. 꼭 ‘천수대비주’가 아니더라도
‘옴 마니반메훔’을 혀서라도 마음 모으기를,
워찌깨나 아무리 생각을 안 하려고 혀도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맨큼 되는 겨.
“한 집안에 천자 네 명 나는 것보다 도를 깨친 참 스님 한 명 나는 게 낫다.”
예부터 이런 말을 많이 들었지.
만일 중이 되어 도를 통할 것 같으면 그 공덕으로 모든 조상영령들과
시방삼세의 중생들이 다 이고득락(離苦得樂)할 것이니 이 얼마나 좋으냐 말여.
이 세상이라는 게 중이 되면, 머리가 있고 없고 글이 있고 없고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여.
차라리 그런 것들은 없는 게 훨씬 나아. 참으로 사람 되기가 어렵고,
천상천하에 그 광명이 넘치는 불법 만나기가 어려운데 말이지,
사람 몸 받아가지고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워디 있을 겨.
부처님께서도 “나도 너를 못 건져준다. 니가 니 몸 건져야 한다” 하셨어.
그러니 참 그야말로 마음 닦아가지고 니가 니 몸을 건지지 못하고 그냥 죽어봐라,
이렇게 사람 몸 받고도 공부를 이루지 못하고 그냥 죽어봐라,
다 쓸데없다. 어느 날에 다시 이 몸을 기약할 것인가.
수월 스님은?
수월(水月, 1855~1928) 스님은 혜월, 만공 스님과 더불어
경허 스님의 3대 제자 중 한 분으로 머슴 생활을 하다 서른이 가까워서야
충남 서산 천장암에서 출가했다.
그 후 금강산과 묘향산 등 현재의 북한 지역의 사찰에서 수행하다
간도에 초막 같은 송림산 화엄사를 창건해 그 지역으로 흘러든 조선의 유민들과 독립군들까지 거두었다.
1928년 여름 안거를 마친 스님은 화엄사 옆 개울에서 짚신을 머리에 얹고 단정하게 열반에 들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조선말기에 내가족들도 못 먹여살리는 형편이었으므로 외삼촌은
남의눈도 있고하여 생질을 데려다 놓았지만, 부담도 되고 힘도들어 머슴처럼 부렸다.
20세가 넘어가면서 ‘이렇게 사느니 산골로 들어가 중노릇을 하며살리라’
결심을한 그는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출가하여 성원(性圓)스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하여 불경을 배워도 쉽게 이해하지를 못했다.
성원(경허)스님이 예불문을 일러주면서 ’따라읽어라’ 하면 ’혼자서읽어보라’고 하면
한구절도 못외우는 것이었다.
몇번을 그렇게 해 보다가 은사 성원스님은 글을 가르치는것을 포기하고 나무하고
밥을짓는 공양주(供養主)등의 소임을 3년동안 맡겼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수월스님이 불공할때 올릴 마지를지어 법당으로 갔을때 ,
마침 부전스님(불공을주관하는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송(頌)하고 있었다.
"나모라다나다라야야바로기제새바라야모지사다바야…
나모라다나다라야야나막알약바로기제새바라야사바하."
스님은 이를 한번 듣고 모두 외울수 있었다.
그토록 머리가 좋지 않다고 구박을 받았는데, 총442글자의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저절로 외워진 것이다.
이후 스님은 나무를 하러가거나 밥을짓거나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외우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당연히 제시간에 와야할 마지는한참이 지나도 오지않고
밥타는 냄새만 절안에 진동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겨 부엌으로 찾아간 성원스님은 전혀 예상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수월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면서 계속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있는 것이었다.
밥이 까맣게탄것이 문제가 아니라, 솥이 벌겋게달아 곧 불이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속에서 대다라니를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본 성원스님은 .
"오늘부터 너에게 이방을 줄터이니, 마음껏 대다라니를외워보아라.
배가 고프면 나와서 밥을먹고 잠이오면 마음대로 자거라.
나무하고 밥짓는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수월스님은 ’감사하다’는 말한마디를 남기고, 가마니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짝에 달았다.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기 시작했다.
방밖으로는 밤낮없이 대다라니를 외우는 소리가 울려 나왔을뿐,
물 한모금 마시러 나오는일도 없고 화장실가는 일도없었다.
이렇게 수월스님은 천수삼매(千手三昧)를 중득하여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불망념지(不忘念智)를 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글을몰라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원도쓰지 못하였지만,
불망념지를 이룬후 부터는 ,수백명의 축원자 이름도 귀로 한번들으면 불공을 드릴때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고 한다.
그리고 천수삼매를 얻은 뒤에도 참선 정진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잠을쫓았다’는
그 말씀대로 일평생 잠을자지 않았다 한다.
만공스님방.
경허스님 방.
경허스님방.
믄가 알수 없는 기가 흐르고 마음이 겸손해진다.
수월 혜월. 만공스님을 그린것은 아닐까.?
천장사는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존경받는 경허 선사가 주석하며 정진한 도량으로,
최인호 작가의 소설인 ‘길 없는 길’의 무대로 알려지면서 대중들의 마음에 각인됐다.
선사가 계룡산 동학사에서 화두를 깨친 뒤 머물렀던 보림처이기도 하며
만년에 다시 돌아와 가사(歌詞) 문학의 명작인 ‘참선곡(參禪曲)’을 집필한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시간나면 서점을 꼭 들려야 겠다는 생각.
혜월스님 수행동굴을 찾아간다.
이 고양이가 앞장서서 가길래 인도해줄 꺼라는 생각에 따라 갔는데 바위굴을 찾지 못했다.
언제나 여행을 하다보면 놓치는 장소와 야그가 있다.
그래서 다시 찾기도 한다.
천장암을 다시 찾기로 마음 먹어 본다.
저 아래를 처다보니.....두 스님의 전해오는 야그가 생각난다.
제자인 만공 스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시냇물을 건너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던 한 여인을 만났다.
경허 스님은 대번에 그 여인에게 강을 건네주겠다면서 여인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넜다.
여인이 떠나간 뒤에 한참 뒤 경허 스님에게 만공 스님이
“출가자가 어찌 젊은 여자를 등에 업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경허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 여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여자를 등에 업고 있느냐.
내려와서 마을 입구로 나가다가 ..........
물레방아가 있었다는 자리이다.
나는 이렇게 옛날을 찾아가는 재미로 여행을 한다.
그 맛에 의도하지 않게 수준높게 인생을 즐기기도 한다.
천장사 지장암은 경허 선사가 18년 동안 주석하면서 칼을 갈아 턱에 받치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 수마(睡魔)를 물리칠 만큼 초인적인 수행력을 보였던 유서 깊은 도량이다.
지장암은 천장사에서 조금 떨어진 산모퉁이에 위치한 도량으로,
내가 갔을 때 사방을 대나무로 막고 문도 닫아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오지 못한것이 몹시 아쉽다.
돌아온 지금 지장암은
경허 선사는 120여년 전 지장암에 주석하면서 화두 참구와 참선 수행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지장암은 경허 선사가 한겨울 홀로 정진하면서도
지장암 토굴의 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벽 사이에 커다란 틈이 생기고
찬바람이 그대로 들이칠 만큼 문창이 뒤틀린 집이었는데
“경허 선사께서는 한겨울 추위와 바람을 막기 위해 불장에 보관된 ‘화엄경’을 뜯어서
문도 바르고 벽도 바르는 등 도배했다고 하는 지장암이다
수행하는 몸에 이들이 득실득실해도 선사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정진하신 곳이 지장암이었다고 한다.
나는 속세의 일이 신경쓰이고 답답해지면 이렇게 산속을 헤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내 기록물을 다시 들추어 본다
2023년 2월 18일 밤 늦은 시간 그분을 보내었다 내가 아버지라 불렀던 분을
화장하고 20일 장례를 마치었다
나는 天葬으로 마무리 되겠지만 그분은 내 손으로 火葬을 거처 地葬으로 마무리 했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소환장. 부고장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來.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되는것이 내 최종의 모습이고 희망이고
덧없는 인생에 부질없이 집착하고 싶지 않지만 속세의 아버지를 보내고 나서
나는 갑자기 천장암이 생각 나더라.
'가고. 보고知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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