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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마을
신채호(申采浩,) 1882년 12월 8일에 출생하시어 1936년 12월 21일에 돌아가신 독립운동가이면서
민족주의 사학자이시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이며 필명은 금협산인· 무애생· 열혈생· 한놈· 검심· 적심· 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 박철· 옥조숭· 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하여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선생과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1939년 2월 21일 만주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증과
동상. 영양실조및 고문 휴유증으로 운명하신 분이시다
조선조 세종. 세조 때의 그 유명한 신숙주의 18대손이었지만 일찍이 몰락하여 그의 11대조 때부터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족향(族鄕)인
현재의 충북 청원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16세때인 1895년에 첫 번째 부인 풍양 조씨와 결혼하였으나
어린 아들 신관일(申貫日)이 죽자 사실상 이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사직하고 단발을 결행한 뒤
낙향하여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장지연에 의하여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11월 20일,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채호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79년 박은식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하던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특히 신채호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로 평가받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그의 나이 불과 29세에 발표한다
신채호는 한때 실의와 좌절에 빠져 무정부주의와 불교에 관심을 더 깊이 보이게 되었고,
북경의 순치문 안에 있는 석등암에서 출가하여 1924년 3월 북경 교외의 관음사에서
61일간의 계를 마치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유마경, 능엄경을 연구하였고 마명의 대승기신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후 국사연구에 뜻을 더 깊게 두고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2년에 중국역사연구법을 쓴 양계초 선생의 역사 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아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였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조선 고대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을 게재하였고,
1924년 10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상고사 이두문 명사해석법’,
‘삼국사기중 동서양자 상환고증’,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평양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들은 1930년대에 ‘조선사연구초’라는 책으로 묶여졌다.
신채호는 1923년 이후에 이회영과 유자명, 그리고 중국인 이석증 교수와 교류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이 신채호를 만나서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신채호는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상하이로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기도 한다
1928년 4월 그는 북경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였고,
이 회의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5월 8일 잡지발행을 위한 자금을 위한 위조화폐를 가지러 5월 8일 타이완의 기륭항에
상륙하다가 체포되어 7개월간 구속되었으며
재판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는 1929년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과 유가증권 위조 등의 혐의로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5년 그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은 “보호자가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했으나,
그의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신채호는 가석방을 거절하였다.
1936년 2월 18일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 감방 안에서 혼자 고통스럽고 외롭게 돌아가시니 향년. 57세였다.
집안어른들의 강요로 풍양조씨와 결혼하였으나,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신관일이 우유에 체해서 병사한 일을 계기로 이혼하였다.
북경에서 박자혜와 재혼하여 수범과 두범 아들 둘을 낳았는데,
신두범은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후 1942년 영양실조로 죽었고, 1944년 처인 박자혜도 병사하였다.
차남 신수범은 1945년 북간도로 이주한 직후 해방이 되자 다시 평양으로 이주했다.
신수범은 1950년 남하, 거제도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1953년 풀려났으며,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에 정착했다고 한다.
신수범의 다른 자녀들은 북한에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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