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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논산. 계백장군의 묘.

한유(閑裕) 2017. 4. 7. 03:28

72.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로 311-54 (황산벌)

 

전쟁중에도 어머님의 안위를 걱정하며 효도를 다한 장군은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분은 이순신 장군이고 애정을 비정으로 끝낸 장군은 한번의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 분은 계백장군이다.

 

妻와 子를 자기칼로 죽이고 전쟁터로 나간 장군이 계백이다

처와 자를 칼로베고 충신소리를 들은들 어따 쓸것이며 누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말인가.

가족이외에 그 무었이 소중하단 말인가.

방탕한 의자왕을 위하여..... 호의호식하는 관료들을 위해서.......

오로지 충절을 해야겠다는 그 쓰잘떼기없는 망상 때문에 황산벌에서  피터지게 싸웠더란 말인가.

 

신라의 장수 품일의 아들 어린화랑.  관창의 동기부여로 인하여 신라군의 오기를 작동한것이 잘못은 아니다.

멸망을 기다리는 처지가된 나라꼬라지가 개판이된게 원인이지 영민하고 똘똘한 젊은 의자왕에게

계급장 단늠들이 아니되옵니다라는 소리로 강대국 건설을 하려는 야망의 앞길을 가로막아서

부국강병의 정치를 포기하고 주색잡기로 허탈을 달래게한  백제정부의 관료들늠들이 잘못이지.

계백......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을 방어하다가 패하여 죽었다.

계백은 기울어져 가는 백제를 구하고자 결사대 5,000명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벌 싸움에 나갔다.

출전하기 전에 자기의 처자들이 패전 뒤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하여 미리

자기 손으로 죽였으며, 자신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것을 맹세한다.
그가 이끄는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의 5만여 군사와 4차례나 싸워 이겼다.

그러나 결국 나이 어린 화랑 반굴·관창의 전사로 전의를 불태우며 노도처럼 밀려드는  신라군을 당하지 못하고 패배하고는 최후를 마친다.

백제의 마지막왕인 의자왕 초, 왕권 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한 백제는

중국과 신라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와 연결해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다.

642년(의자왕 2)에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비롯한  신라 남부의 40여 성을 함락시키니

이에 신라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로 보내어 외교 교섭을 벌인결과,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에 이 나당연합군이 드디어 백제 공격을 단행한다.

소정방(蘇定方)의 군대 13만명의 당군은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김유신(金庾信)과 흠춘(欽春)·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를 공격한다.

 

급보를 접한 의자왕은 군신을 모아 대책을 강구하였다.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했고,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 쳐서

예봉을 꺾은 뒤에 당군을 막자고 해 의견이 갈렸다.

해서 귀양 중이던 흥수(興首)가 왕의 요청에 응해서 계책을 내놓았는데....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白江 : 지금의 금강 하구)을 지켜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탄현(炭峴)을 막아 신라군이 넘지 못하게 해 양 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라고 하였건만.....

(탄현의 지금 위치는 대전 동구와 충북 옥천군 경계에 위치한 식장산으로.

이 산마루가 탄현(炭峴) 또는 숯고개·숯재라 불리었다고 한다)

반면에 대신들은 당군이 백강에 들어오고 신라군이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백제 조정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신라군은 그 해 5월 26일 왕경을 출발해 6월 18일

백제가 우왕좌왕하고 있는사이에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은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탄현을 지키지 못한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伯)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은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자기손으로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한다.

여기서 말문이 막힌다

계백은 이미 질것을 예단하고 전쟁에 나선것이다

만일 승리하여 개선장군이되어 사비로 돌아왔다면 그 허망함은 어쩔것인가 하는 점이다.

황산벌에서 만난  계백은 전해오는 야그대로 죽기로 싸우는 백제의 5,000결사대는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승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군은 기력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김유신의 눈치를 보고 있든 신라의 장군 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위아들 반굴(盤屈)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게 하고,

장군 품일도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을 희생양으로 백제군 속에 뛰어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이긴다는 내용이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한다,

이것이 황산벌 전투의 결과이다.

황산벌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소정방이 당군과 합세하기로 한 신라군이 기일을 어겨 도착했다고 

신라독군(新羅督軍)인 김문영(金文穎)을 참하려 했을 때, 김유신이 소정방이가 황산벌의 치열한 싸움을 보지 못하고

다만 기일을 어긴 것으로 죄를 주려 하니, 당나라늠들의 무례함에 뿔다구가 나서 

기필코 먼저 당군과 결전한 뒤에 백제를 격파하겠다.”라고 한다.

그만큼 백제의 5000결사대는 사투를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만일에 백제가 삼국을 통일 했더라면 세계지도가 바뀌었을 것이다.

제는 실상 대단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절반이 지금은 한국땅이 되었을것이기 때문이다

황산벌을 바라보며 유적지를 둘러본다.

 

 

 

 

 

 

 

 

 

애국충정을 명분으로 자기의 처와 자식을 죽이고 전쟁터로 간다는것은 모순이다.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생각한 계백의 생각에  나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만들고 낳았으니 생사여탈권을 아버지가 가진다는 법은 세상에 없다.

처와 자식들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였을것이다.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죽임을 당해야하는 가족들도 동의하지 않았다고 본다.

내 가족을 죽이면서까지 나라를 지켜라하는 애국이 무슨억지인가.? 

처자식을 죽인 것이 愛情때문인가.

아니면 非情인가는 휴머니즘의 상식에서 판단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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