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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당촌길 41-8
녹두가 무었이냐 그것부터 알고 넘어가자. 녹두.......
1년생 초본으로 인도가 원산지인 재배식물이며 전국적으로 심는다.
꽃은 황색이다. 종자는 타원형으로 녹색이나 갈색이고 그물 같은 무늬가 있다.
열매를 식용하거나 연한 싹을 데쳐서 무쳐 먹는다.
구취, 만성간염, 부종, 산전후통, 설사, 수종, 암내, 여드름, 이뇨, 임질, 종기,
주독, 풍열, 피부미백, 피부윤택, 해독, 해열에 좋다고 한다,
농민이 누구냐.?
녹두도 심고 콩도 심고 벼도 심는 사람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농민이다.
그들이 뿔이난것은 이유가 있다. 농자재값은 비싼데 쌀값이 싸다는데 있다.
쌀값이 형편없는데 쌀을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기에 뿔이나서
트렉타를 몰고 작년에는 서울로 가기도 했다.
농민의 입장에서 가격이 좀 좋다고 느끼면 바로 수입에 들어가는 정부는 누구의 정부인가에
의문을 품은 사람은 분통이 터진다고 한다.
이와는 본질적으로 상황이 다르지만 그 옛날 전라북도 고창에서는
죽창과 낫과 쇠스랑을 들고 서울로 북상한 세력이 있다. 그들이 동학농민군이다.
농약이 있나 비료가 있나.? 없응께
유기농농사를 어쩔수 없이 영농방법으로 해서 생산하다보니 소출이 적을수밖에 없는데
그 적은 수확물을 탈탈털어 수탈로 빼앗기게 되니.....
빼앗긴들에 봄은 오지만 보리고개가 늘 버티고 있었으니.....
죽지못해 산다는 말이 정답이된 것이다.
해서 들고 일어난 사람들이 농민이고 그 대표자가 파랑새장군 전봉준이다.
장군이라하지만 그는 국가에서 계급장을 받은 장군이 아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과 농민들이 추대해서 장군이 된것이다.
위정자들이 보아서는 반란군 수괴이겠지만...............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이자 지도자였던 전봉준 장군은 1855년 12월 3일 이곳 고창읍 죽림리 63번지 당촌 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전장혁의 아들로 태어나 13세 무렵까지 살았다.
당시에는 서당,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모두 소실되었다.
전봉준 장군 생가는 사적 제293호로, 고종 15년(1878)에 세워진 초가 3칸의 돌담집이다..
남향으로 동쪽부터 부엌, 큰방,윗방, 끝방 순서로 되어 있으며,
부엌은 앞뒤로 두 짝의 널문을 달았고,
큰방과 윗방은 장지문을 통하며 연등천장이다.
끝방은 곳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끝방 앞쪽은 담을 둘러 땔감을 두었다.
두 방 앞은 툇마루를 놓았고, 대문 동쪽에 화장실이 있다.
집둘레의 돌담은 돌 사이에 회를 넣어 굳히고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었다.
그는 오척 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얻어 일명 녹두장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듯이 콩만한것의 그콩 녹두가 그의 별명이 된것이다.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지도부는 1894년 3월 20일(음)에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인 무장기포지에서 4,000여명의 농민군이 모인 가운데
갑오동학농민혁명운동. 최초의 봉기선언문인 창의문을 발표하고
조직적인 항쟁에 들어감으로써 전국농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봉건적 지배세력에 의한 수탈과 억압에 반대한 민족운동이며
제국주의적 외세 침략에 맞선 국권수호운동으로 갑오개혁의 도하선이 되었으며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세운 민중항쟁이었다.
전봉준장군의 생가터에서 바라본 지금의 농촌.
전봉준 (1855 - 1895 )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은 1893년 3월 금구집회를 주도하였고 1893년 11월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894년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에서 봉기하였다
같은해 3월 농민군 총 대장으로 추대되어 황토현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후 전주를 점령한다
그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조선침략 의도가 노골화되자 삼례에서 재차 봉기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던중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패배한다
이후 순창 피노리로 피신중에 부하인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이듬해 3월에 처형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여기서 우리인간사에 배신자는 항상 가까이 있고 내부에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후 나라꼬라지는 아래와 같은 상황이 된다
이등방문(이토우 히로부미)와 영친왕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논갈고 밭이나 갈아서 먹고 사는 순박한 농민들이 쇠스랑과 작두. 식칼. 곡갱이. 낫을 들고 일어났다
시국의 어수선함에 편승한 관리들의 탐학에 견디지 못하고 비록 오합지졸이란 이름을 들을지언정
농민군이라는 이름으로 동학군이라는 깃발아래로 모여서 분노했다
개 돼지에 불가하다는 상위 1프로의 사고방식에 반기를 들고 민중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광화문 광장으로 향행했다
백성이 배가 불러 빵빵하면 정치는 언늠이해도 관심이 없다고 했다.
즈거들끼리 갈라묵기하고 짜고치는 고스톱을 치니까 민초는 늘 소외되고 배가 고팠다
해서 우리도 다같이 나누어 먹자고 파랑새인 녹두장군을 필두로 하여 농민들이 모여서
집회와 시위를 넘어 무력항쟁을 하기까지 이른다 동학 농민 혁명군이라는 군대가 생긴것이다
정읍 황토현(井邑 黃土峴 )은 농민군이 관군과 처음으로 싸워 대승을 거둔 자리이다.
이곳은 해발고도 70m이며, 당시 태인과 고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1894년 1월의 고부봉기를 일단 해산한 농민군은 안핵사 이용태가 난민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살생과 방화,
약탈을 일삼자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 전라도 남접계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1894년 봄 고부군수를 한 그 못된인간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봉기한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하고는. 농민군과 관군은 황토현에서 한판 붙어보게 되었다
4월 6일 밤 농민군이 기습공격을 하여 대부분의 관군이 전사하여 농민군은 1개월 만에 호남지방을 석권하였다.
작은 고갯마루에 불과한 황토현.........
동학 농민운동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동학운동의 의의를 나타내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황토현 싸움에서의 승리는 동학농민운동을 크게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여 동학농민운동의 막이 내려지지만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굼뱅이같은 민초들도 화나면 엎어 버릴수 있는 힘과 분기를 보여준 전투였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격전지이다.
동학농민군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일어나, 다음 해인 1894년 1월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으나, 정부에서 사태 해결을 위해 파견된 관리가 잘못을 농민군에게 돌려 탄압하자,
이에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다시 일어나게 된다.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주변의 곡창지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백산으로 진출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전주감사는 관군을 보내 이를 막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관군과 농민군은 정읍의 황토현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밤을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농민군은 관군을 크게 물리치게 되었다.
황토현전투의 승리로 인해 기세가 높아진 농민군은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나아가 전주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죄없이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무기도 탈취했으며, 무장으로 진격하여 교도 40여 명을 구출하였다.
天文學은 天.하늘천 文글월문 學배울학.이고 地理學은 地.땅지 文글월문 學배울학 이며
人文學은 人.사람인을 써서 사람을 배우고 익히는 학문을 말한다.
天.地. 人.을 안다는것은 결코 허영이 아니다.
그 천지인이 가는곳마다 조금식 다른 이야기가 있다
전혀 다른이야기도 있다. 천.지.인. 세글자가 세상의 모든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나는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가 궁금하다.
정읍의 황토현 전적지에서 오척단구의 녹두장군 전봉준장군을 보았다
만났다. 그 작은체구에서 만들어낸 동학 농민전쟁을 정읍에서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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