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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 합천. 남명조식선생생가

한유(閑裕) 2025. 5. 6. 18:57

642.

*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합천이 낳으신 남명 조식선생의 흔적을 찾아 갔더라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인 남명 조식선생은 1501년(연산군 7)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아버지 언형(彦亨)과 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서 3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는 분이다.

그 분은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이다.

본가는 삼가 판현이고, 외토리의 집은 외가이다. 다섯살 때까지 외가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가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하였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서울사람이 된다

(아버지가 당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퇴계 이황과 더불어 경상좌·우도를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한 분이다

 

아래 사진은 용암서원이다

용강서원의 본래는 삼가현의 서쪽 회현 아래 가회면 장대리에 세원 회산서원인데.

이 서원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황강 주변으로 옮겨 향천서원으로 복원되어

1605년 8월에 남명 선생의 위판이 봉안되었다고 한다.

용강서원이 1609년에 용암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조선 말기에 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2007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 복원되었다게 이력이다.

서원의 건물로는 사당 숭도사와 전사청, 강당 거경단, 동재 한사재,

서재 존성재, 내외의 삼문으로 지숙문과 집의문이 있다.

 

남명(南冥) 조식선생은 .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소문이 명종과 이어 선조에게까지 이어진지라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였으며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고 한다.

 

퇴계선생의 출생년도가 1501년이고 조식선생도 1501년(연산군 7)이니  동갑내기가 아닌가.

한시대에 그것도 같은 나이의 두 학자가 조선땅에 태어나다니 길조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길함 가운데 흉함이 있는 법.

같은 나이에는 여자로서는 중종의 마누라인 문정왕후가 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일어킨 중종의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정국을 뒤흔든다

여인천하는 월탄 박종화선생의 소설을 sbs 월화 드라마로 방영이 되었다

150부작으로 국내 제작 드라마 중 방송 횟수가 가장 많은 기록으로 꼽히기도 하는 여인천하.

나라 꼬라지를 개판으로 맹근 여자들이 지랄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동생인 소윤(少尹) 윤원형(尹元衡)에게 정권을 쥐게 한 결과

부폐해진 권력은 인종의 외척인 대윤(大尹)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원로(尹元老)를 해남(海南)으로 귀양보내고 윤임 등을 죽여 버린다.

문정왕후는 사실인지는 알수 없어도 스캔달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수 없지만 승 보우(普雨)를 내세워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한다

먼저 죽은 서방님 중종의 능을 보우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奉恩寺)로 이장시키기도 하고

사화를 일어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인다

1545년아들인 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는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을 위시한 소윤(小尹) 세력이 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 일파인 대윤(大尹)

세력을 몰아내면서 일부 사림들을 함께 처단한 사건이다.

을사사화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윤원형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부패한 권력자이다

그 인간 옆에는 정난정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온갖 악행과 갈취한 재산이 왕의 재산보다 많은 그는 누나인 문정왕후가 죽은 후 탄핵을 받고

정난정이와 자살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조식선생의 외가이지만 어려서는 이곳에서 자랐음으로 생가로 하는것이라 본다.

야튼 조식선생과 한동갑인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고 있을때. 즉 명종시대에는 정철같은 문학자도 있었지만 

역사를 흝어보면 백성들은 죽지 못해 살았다고 보면 된다

한편 명종이 왕일때 임꺽정이라는 도적이 출현해 조정에서는 임꺽정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임꺽정은 황해도 지역을 기반으로 전국에 걸쳐 활동했는데,

'의적(義賊)'이라고 불리며 백성들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만 사실은 잔인한 인물로 전해진다

북한으로 가서 부주석까지 한 홍명희의 소설 주인공인 임거정이 바로 그 임꺽정이다.

 

조식 선생이 벼슬을 하지 않은 이유가 분명 시대적 상황도 없지는 않았겠다 싶다.

30대 후반에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로

학문의 깊이가 뛰어난 조식선생은 오로지 탐관오리에다 굶어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며

제자들만 양성한다

퇴계의 이론적 성리학에서 벗어나서 현실에 바탕을 둔 실천의 성리학으로
그의 명망이 높아지자 이언적이라는 분이 헌릉참봉이라는 말단 공무원 자리를 추천하는데........

이미 대 학자인 분이 체면이 있지 말단 공무원에 관심이나 있었겠는가

또 퇴계 이황선생이 단성현감이라도 해 보라고 하지만 거절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퇴계와는  원만한 관계였으나 후일 퇴계가 고봉 기대승과 이기(理氣)의 사단칠정을 논함에

남명이 퇴계를 두고 그 말을 했는지 아니면 당대의 성리학 신봉자들에게 일갈을 날린건지

물뿌리고(灑) 마당쓰는(掃), 쇄소(灑掃)하는 생활 방법도 모르면서

천리(天理)를 논하며 선비를 참칭한다고 비판하면서 퇴계와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그는 당대 퇴계 이황(1501~1570)과 학문적 쌍벽을 이룬다

퇴계 이황이 불사무의(不仕無義), 벼슬 하지 않으면 의(義)를 실천하기 어렵다면서 출사를 권유하자

남명 조식은 출사하는 것을 도천지물(盜天之物), 하늘의 물건(관직)을 훔치는 것과 같다면서

후학 지도에  실천지학(實踐之學)으로 후진을 양성한다.

내암 정인홍과 망우당 곽재우를 비롯한 남명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승의 실천 학문에 따라 의병을 일으킨다.

곽재우장군의 부인은 조식선생의 외손녀인 상주김씨이다

처사(處士)의 길을 고집한 그분은 산천재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묘가 있다

하지만 세상은 임란 후 남명 제자들은 광해군 조정에 북인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나

남한산성에서 나와서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인물 인조의 등장으로 몰락한다.

 

 

그 옛날에는 초가집이었는데 새마을 운동으로 뜯겨버린것이라 들은것 같은데

이렇게 기와집으로 복원중(?)..................

하여간 남명 조식선생을 아둔한 내가 평가하는것은 아니지만

권력을 탐하지 않고 높은 벼슬도 하지 않았지만 그분의 학문적 명성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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