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곡로 45
경북 영천에서 한창 조성되고 있는 정몽주선생의 생가를 방문하고
언젠가는 꼭 찾아 보기로 한 정몽주선생의 묘소를 찾게 되었더라.
(누가 뭐래도 한길로 갈터이니 네놈들이 선죽교에서 기다리거나 말거나
죽이거나 말거나 마음 대로 하거라.)
아이야. 정몽주선생이 태종이방원에게 한 말씀이시다
남들이 맛집을 찾아 보신하고 풍광좋은 곳에서 휠링이란것으로 늙음을 아쉬워 하고 있을 때
세월이야 가거나 말거나 팔도유람에 여념이 없어 들린곳이 이번엔 경기도 용인이다.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란 말이 있다만 용인사람들은 거이 사용하지 않는 말인데.........
단심가로 유명한 고려말의 노 정객이 있다.
경북 영천이 고향인 정몽주선생이 개성의 선죽교라는 작은 다리위에서 박영규가 휘두른 철퇴에
명을 달리하시고 말았더라.
정몽주선생의 묘를 찾아서 좌로 꺽었더라.
목은 포은 야은 을 삼은이라 했지.
풀어보면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두고 하는 말이렸다.
여말삼은(麗末三隱,) 중 한 사람이다.
보통 여말삼은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吉再), 목은 이색을 꼽는다.
여말삼은에는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승인 (李崇仁)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숭인 또한 정몽주의 제자이고. 야은 길재는 이색과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길재는 조선 왕조를 섬기지 않았으나 영남학파의 영수인 김종직이 맥을 이어
조선 왕조의 후반기 정치사조를 지배한사림파가 나왔다.
한 마디로 조선 시대의 강력한 정치사조는 고려 최후의 충신을 학문적 비조로 삼는다
포은의 묘역에 연안 이씨의 비석군이 있다.
필시 이유가 있을 터.
고려말의 관료이지만 정몽주의 학맥을 한번 살펴보니 조선조 까지 이어진
조선 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충절은 충효를 제일로 치는 나라인
조선에서도 높이 숭상되었기에 그 후손은 조선 왕조 내내 혜택을 받았다.
사례를 들면 세조때 정몽주의 손자로 장손이기도 했던 정보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자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두둔한 죄로 거열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정보가 끌려나간 후에 세조가 정보가 어떤 사람인지를 주변에 묻자
신하들이 정몽주의 장손이라고 대답하여 이에 놀란 세조가 형을 중지하고
영일로 귀양을 보내는데 그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의 친구이자 라이벌이며 조선을 세우는데 앞장선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은
절의를 지키기는커녕 단종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에게 붙어 잘먹고 잘 살았다.
그 유명한 단심가이다.
1392년,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성계가 멀쩡히 돌아오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이성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의 집에 방문했다.
기록으로는 이때 이방원과 술자리를 했고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자,
정몽주선생은 단심가로 화답했다고 하는 그 단심가가 돌에 세겨져 있다
정몽주가 죽기전 그의 어머니가 정몽주에게 충고하기 위해 지은백로가이다.
어쨌든 이것으로 이방원은 정몽주가 이성계의 신왕조 수립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라고 판단하고, 조영규라는 자객을 시켜 죽이고 만다
공식 기록인 실록에는 조영규가 먼저 말을 공격해서 말이 넘어지자
정몽주도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 달아났는데, 이것을 쫓아가서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기록은 정몽주가 낙마한 이성계의 병문안을 가기 전에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계획에 대해서 알았다는 점에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왜 죽을 줄 알면서 병문안을 갔는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단다.
이 난리 중에 정몽주의 동생 정정과도 형과 같이 죽음을 당했고,
다른 동생 정정도는 유배되었다.
유배된 동생 정정도는 살아남아 형의 문집을 발간했다고 한다.
다만 이와 별개로 정몽주의 아내와 자식들에게만은 아무런 책임을 묻지않아 그들은 무사했다.
이 선죽교에서의 죽음은 이후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정몽주는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을 수행하던 머슴 김경남에게 너는 어서 피하라고 충고했으나
충직한 머슴은 같이 죽겠다고 하여 그를 뒤따라갔다.
이 설은 권근이나 권우가 머슴역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권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날 권근이 끝까지 모시고 가려고 했으나
군인들이 거리를 분주히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정몽주가 주변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고 한다.
정몽주는 이 때 일부러 나귀를 거꾸로 타서 자객들을 기다렸다고도 한다.
묘소로 가는 길이 좀 특이하게 자연석 바위같다.
명당의 어디에나 있는 연못 인공적으로 조성하는 경우가 많다.
이분의 묘도 중요한 역사의 흔적이다.
이석형선생이다.
이 묘역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외에도 묘들이 많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생기처(生氣處)인 혈(穴)에 모셔진 묘는 하나도 없다고 풍수쟁이는 이야기 한다.
그 곳에는 생기처(生氣處)인 혈(穴)이 두 곳이 있는데
현재까지 주인이 나타나질 않아 생자리로 남아 있다면서.
포은 선생과 저헌 선생의 묘를 비롯한 밖에서 보이는 묘들은
진혈(眞穴)을 보호하기 위한 청룡과 백호에 해당하는
보호사(保護砂)에 모셔졌을 뿐만 아니라 무맥지라고 판단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판단이라 믿는다.
옛풍수들이 그냥 무지렁이 풍수는 아니었었을터.....
정몽주의 손자 정보의 사위인 이석형 또한 뛰어난 문장가로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이다.
세조 밑에서 벼슬했고 그의 총애를 받긴 했지만
역시 사육신의 절의를 기리는 시를 남기기도 했단다..
여담으로 정몽주의 손녀가 명당터를 얻어서 자신의 시갓집을 잘되게 하려고
무덤자리에 물을 부어서 정몽주의 원래 무덤자리로 예정되어 있던 명당을
훔쳤다는 야사가 있는데 이는 후대가 꾸민이야기란다
이 야사에 나오는 손녀는 실제로는 정몽주의 손자인 설곡 정보의 딸인데
그 딸이 이석형이라는 인물에게 시집가 자식을 낳고 젊은 나이에 죽자
정보가 원래 자기 무덤자리로 찍어놓은 곳에 딸을 묻었고
이석형도 후에 죽어서 아내 무덤 가까이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 야사는 후에 이석형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자 생긴 이야기다.
실제로는 그 두 집안이 서로 가까워서 정씨 가문의 선산에 이씨 가문의 묘소가
같이 혼재되어 있었는데 일제 시대 선산 분쟁이 일어나 이씨 가문의 묘소가
모두 이장되어 나가고 이석형의 무덤만 남은 것이라고 한다.
이묘가 이석형선생의 묘다.
1415(태종15) ~ 1477(성종 8). 조선초기 문신.
본관은 연안. 자는 백옥. 호는 저헌. 시호는 문강이다.
대호군 회림의 아들이며 김반의 문인이다. 1441년(세종 23)에 사마시에 합격,
이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좌정언에 제수되고,
이듬해에 집현전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 학사로 재임 하면서
집현전의 응교. 직전. 직제학을 두루 역임 하였다
집현전 응교로 재임한 1447년 문과 중시에 합격 하였으며 왕명에 의하여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로 학문에 진력 하였다.
1461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경기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호조참판을 거쳐 판한성부사에 7년동안 재임 하였다.
1470년(성종1)에는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지성균관사를 겸하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 4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에 봉하여졌다
묘소는 지금 여기 포은 정몽주 묘소 우측에 있다.
성종8년(1477)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해 2월 8일, 부인 연일정씨와 합장 하였다.
그 묘가 이 묘인 것이다.
자 여기가 정몽주선생의 묘소이다.
원래는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하려고 관을 옮기던 중 명당자리를 발견하여
그 자리에 이장하고 자손들이 터를 잡게 된 것이 현재 묘소라고 한다.
상당한 명당인데 후에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여
그 능터를 찾던 지관이 적당한 곳을 발견했는데 그 곳이 바로 정몽주의 현 묏자리였다.
이에 선조는 난색을 표하면서 명당을 얻기 위해 충현의 무덤을 파헤칠 수 없다하여
다른 곳을 찾아 의인왕후를 매장토록 했다.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 일대를 능골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일화에 따라서
왕릉 자리로 택지될 정도의 명당터라는 뜻이라고 한다.
위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조선 시대에 복권되면서 무덤 또한 대단히 크고 화려하게 단장하여
거의 왕릉 수준으로 다듬어져 있다.
유림의 정몽주에 대한 존경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사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유림의 존경심이 담긴 표현이다.
본래 묘비에는 생전의 관직 뿐만 아니라 사후에 추증된 관직들도 모두 적어서 기리는게 보통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정몽주를 충신으로 인정하고 조선의 관직들을 추증하였으나
유림들은 정몽주가 오직 고려의 충신임을 주장하기 위해 이런 묘비를 지은 것이라 한다.
묘비명은 매우 담박하게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고려 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
즉 '고려 수문하시중을 지낸 정몽주의 묘'라고만 쓰여져 있다
각도를 달리하여 한장 더...........
묘지내의 석물이다.
저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묘가 저헌 이석형선생의 묘이고.......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은 대단한 효자였는데 고려말 아홉 효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정몽주가 참살당하자 이성계 일파가 그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효수했기 때문에
가산은 모두 적몰되었는데 정종성은 동생과 함께 피신하여 숨어살았다.
지방에 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근근히 살았다고 하며 태종 때 정식 복권된 뒤에도
'정씨의 아들인데도 전하가 봐줘서 살아있는줄 알아라.'라는 식으로 폭언을 들었고
조정 권신들에게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부친의 복권 이후에는 조선 조정에 출사했다.
이 정종성의 딸은 조선 정종의 서자로 5번째 아들인 선성군과 결혼하였으며
서녀는양녕대군의 장남 이개의 첩이었으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는 조선왕실과도 인척지간이 된다.
한편 정종성의 얼녀는 조선시대 가장 욕먹는 왕좌찬탈인 세조의 집권을 도운
한명회의 첩이기도 했는데 반대로 아들인 정보는 단종에게 충의를 다해서 결국 거열형에
당할 뻔하다가 유배되고 가산을 적몰당한다.
정보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 그가 정몽주의 손자라는 것을 뒤늦게 안 세조가
'충신의 자손을 죽일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감형한 것. 뿐만 아니라 한명회는
정몽주의 또다른 아들인 정종화의 딸도 자신의 첩실로 두었다는데
한명회는 대 충신인 정몽주의 핏줄로 명문혈족에 대한 부러움을 대리만족한게 아니었나 몰라.
정몽주 선생의 묘 주변에 있는 묘.
묘택에서 내려다 본 풍경.
'가고. 보고知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573. 청도. 내시의 집 (0) | 2021.07.12 |
---|---|
572. 문경. 견휀출생지. (0) | 2021.07.04 |
570. 진주. 승산마을. (0) | 2021.07.01 |
569. 진주. 임금나무 (0) | 2021.06.30 |
568. 화성. 사도세자능 . (0) | 2021.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