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119. 장수. 논개생가.

한유(閑裕) 2017. 4. 7. 19:47

119.

*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

 

통영 대전간 고속국도를 달려 장수 익산간 고속도로를 갈아타고

전라북도 장수.장계 톨게이트에서 내려서 이정표와 표지판을 따라간다

경상남도 최 북단 함양 서상을 지나서 덕유산 육십령 고개를 넘어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어난 고향 마을에서 사방 30리도 못 나가보고 일생을 마친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았다는데

나는 무슨 복을 받고 이시대에 태어나서 만리길로 흝어 보고 있는가에 심히 감사했다

 

이정표만 따라가면 덕유산 줄기에 자리잡은 곳에 한 여인네의 생가가 나타난다

선조 7년(1575년 9월 3일)에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훈장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여인이 있다.

천품이 영리하고 자태가 아름다웠으며, 임진왜란 당시 나라가 위태롭자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나라와 남편의 원수인

왜장 게야무라 로꾸스께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 순절한 의암 주논개의 고향마을이 있다

성은 주씨요 이름이 논개인 그를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간단상식에서야  주논개는 기생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임진왜란의 와중에 진주성에서 순국한 최경회의 첩실이다.

당시의 양반들은 본 마누라외에 세컨드라고하는 스피어 마누라를 따로 두기도 했다.

 

그래. 그 당시 양반이라면 흔히 식솔의 명단에는 첩실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율곡 이이선생. 퇴계 이황선생. 남명 조식선생까지 모두 첩이 있었다

일부 다처제는 아니었더라도 당시의 양반들이 지배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는

당연지사로 받아 들일수 있는 첩실문화가 손가락질을 받는 사회현상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없는것이 오히려 이상한....양반...... 무능한...... 풍류가 없어 보이는것이 시류였다

 

논개생가로 가는 길에서의 상념은 또 이면적으로 흘렀다

논개가 최경회의 첩실이었다에서........ 요즈음 단어로 이야기하자면 세컨드로서.

내연의 관계로 형성된 나이가 논개 19세이고 최경회는 60의 나이였다는데.대단한 나이차이이고

세대차이 였지만 시대는 그것을 허용했다

삼촌을 잘못둔 죄로 팔려가는 신세에서 최경회의 판결로......무죄 석방되었으나 오갈때가 없는 신세인지라.

자진하여 최경회의 집에서 가내종으로 의탁하여 살다가 첩실이 되었다는데...

그 속사정을 어찌 다 알것냐마는 배우 김민희와 홍상수감독과의 나이차가 22세라는데

최경회와 논개의 나이차는 무려 41년이다만 젊은 나이에.

아니 어린 나이에도 논개는 탕국냄새나는 영감과 사랑이란것을 했다는게 역사다.

 

생가 가는길가의 의암호 언덕에 정자하나가 있으니 잠시 쉬어가야한다

저 산을 넘어가는 고개가 육십령이고 논개의 묘가 있는 함양이다

 

저수지안에 수몰된 집들이 논개생가만 있는건  아니겠지.

이 정자에서

저수지로 수몰된 물속이 진짜 생가가 있었다고 하니  물속을 들여다 보았다

조선조 선조때의 한 마을이 은산의 상상력속으로 보면서 그리고......수주 변영로의 시를 음미해 본다.

그 옛날에 왔을때는 소나무가 있는 이 언덕에 논개의 생가가 있었다.

초가 삼간만 덩거라니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철거되고 없더라.

 

 

드뎌 도착한 새 생가지이다.

 

입구다

정면에 바로 논개의 상이 나타난다

 

좀 더 가까이에 가서 논개상을 바라 바라다 보았다

사주팔자내에 12지지(地支)중 술(戌)이 세개나 들어 있어서  저희 부모가 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야사(野史)의 이야기를 회고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다 보다가 실소를 금할수가 없는것은 무슨 천지조화인가.

이 얼굴이 어디 19살의 젊디 젊은 얼굴인가.?

( 주 논개는 19살에 생을 마감했다. )

 

허참.! 허~참.? 혀를 차면서 ....... 왔으니 둘러본다.

우측으로 돌아보니 정자하나가 또 보여서 다가가 보니 ....

단아정이라고 해 놓았더라. 연못 한가운데 있는것은 의암을 상징하는것이겠지.  

 

현판 글씨를 보니 알만한 사람의 글씨더라 합천 시골촌에서 나서 청화대에서 근무한 사람 전두환이라는 사람의 글씨인것이다.

광주와는 뗄래야 뗄수없는 사람이라고 알려진 그 사람은  합천 율곡의 시골 출신이라도 대통령도 될수 있다는것을 

증명해 보인 사람이다

흙수저 출신도 경우에 따라서는 최고의 빤짝 빤짝 금수저로 변하는  매직이 일어난다는 야그가 아닌가.

거짓말도 가지가지로 한다 논개가 어린시절 놀던곳이란다. 누가 보았더냐.?

나란히 자리해있는 부부(?)의 비 최경회 선덕 추모비와 주논개 기생불망비이다.

역사까지 왜곡한다 주논개는 기생이 아니라는데도.........

 

생가를 복원해 놓았더라 물론 짜가이다

보통은 초가삼간인데 갈대지붕 네칸이로다

상상을 동원하여 조성한것이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라 사료된다

 

이계단을 걸어올라

안내표지판을 읽어보니 논개부모 묘라더라 역시 짜가로 이해 했다.

실재의 묘는 아니다.

내려오면서 논개상 뒷모습을 한장 더 찍었다 아무리 봐도 19세의 논개가 아니다.

5-60대의 평퍼짐한 아낙의 모습이다. 내 눈이 잘못됬나.?

논개(論介)..........,1574년 생이고 1593년에 진주 남강의 의암에서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한 여인으로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부실(첩)이다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선비 주달문(朱達文)과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반가(班家)의 딸로 태어났다고 기록은 전한다.

부친 주달문은 진사(進士)로서 슬하에 아들 주대룡을 두었으나 15세에 괴질로 요절하였다.

그라면서 이어가기를 이후 40이 넘은 나이에 논개를 보았지만  부친 주달문의 요절  후 숙부 주달무의 집에 의탁하였으나 

삼촌 달무는 벼 50석에 김부호(金富豪)에게  허혼(許婚)하니 모녀는 경상도(慶尙道) 안의현으로 피신하였지만.

김씨라는 돈많은 부잣집 영감의 기소로 잡혀가게 되니 당시 장수 현감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의 판결로 석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현감의 관저에 의탁하게 되고 ..... 야튼 논개는 최경회의 부실(副室)이 된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동행하였으나,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로꾸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국(殉國) 하였다.

(조사 해보니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확실한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네)

 

2008년 충남대학교 윤여한 교수라는 사람이 그린 논개 영정을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하였다는데

눈깔이 삐었나. 19살 아가씨의 모습이 아닌  50대 아줌마로 그려 놓은것이 온당한것은 아니리라.

표준영정을 진주시가 진주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하니 찾아가 볼 일이다 

다른건 다 이해해도 윤여한이라는 사람이 논개의 영정을 참 엉터리로 그렸다는 아쉬움이 크다.

 

논개나이 19살때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의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경상남도 함안(咸安)·반성(班城)·

의령(宜寧) 일대를 점령하고,3만 7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1593년 조선 관군은 정비되었지만 체제를 정비할 만한 훈련된 군사가

매우 적어 여전히 왜군에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국 각 지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전세를 만회하고 있었다.

관군으로는 경상우병사 최경회 황진장군등이 성으로 들어 왔고,

의병장 김천일 고종후 강희열등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왔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이때 진주 주민도 7만여 명이나 되었지만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은 원병으로 와있던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다가 급히 전투에 참가하느라 지휘체계가 무너지니 임시방편으로 의병장인

김천일이 맡게 되는 임기응변적인 전투체제가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성안의 관군·의병·주민 모두 의기로 뭉쳤을 뿐 훈련된 정규직 왜군에 대항하기는

처음부터 오합지졸의 조선 대항군은 열세적인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수성에 최선을 다하니 왜군은 작전을 변경하여 성벽의 밑바닥을 파서 성을 무너트리기 위해

성 밑을 파기 시작하였고,..... 역사적 운명인가  여름 6월 28일 큰 비가 내려 성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와중에 황진 장군은 왜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고,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고 한다.
제 1차전투에서 패배것을 치욕으로 생각한 또요또미는 생물이면 남기지 말고  몰살시키라고

했다고 한다.

이종인 김준민. 이잠 등은 성 안에 남아있던 남녀주민들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고,

김천일 고종일. 최경회등은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리하여 왜놈들은 승리자축 회식을 하게 된다

이 기회에  논개는  촉석루아래에 있는 의암에서  적장을 끌어안고 투신하였다는것이.

이제는 전설같은 야그로 변모하여 전해진다

 

진주 촉석루를 방문했을때의 사진이다 당시 논개는 이 아가씨정도의 나이였다

'가고. 보고知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1. 경산. 팔공산 수자굴.  (0) 2017.04.07
120. 임실. 의견공원.  (0) 2017.04.07
118. 기도.  (0) 2017.04.07
117. 영천. 포은 정몽주 생가.  (0) 2017.04.07
116. 寅時.  (0) 2017.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