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 경남 거창군 신원면 박산골일대
거창..........
동쪽은 합천군, 서쪽은 함양군, 남쪽은 산청군, 북쪽은 경상북도 김천시와
전라북도 무주군에 접하고 있는 거창은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서 여름에 많이 찾는곳이다.
그런데 거창에는 기분과 분위기는 상상하기가 두려운곳이 있다.
나의 발길은 명승지나 풍류를 즐기기 좋은곳만 찾아가지 않는다
광주학살의 무덤에도 갔었고 노근리의 철길아래에도 갔었고 집단죽음의 현장인 박산골일대도 돌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세곳은 타살에 의한 죽임의 광란지라는 공통점이 있다.
외국에서도 인종청소니 뭐니하며 집단학살을 한 기록이 많다만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가 일부의 군인들에 의하여 사살한 죽임이다.
신원면 소재지를 돌아서 한 입간판을 따라갔다.
이렇게 푸르고 고요한 땅에 죽음이 있다. 박산골이다.
1951. 2. 10. 오후 과정리, 중유리 전 주민과 대현리, 와룡리의 주민 1,000여명을 신원초등학교에 강제로 집합시켜서
이튼날 2월 11일. 주민 1,000여명중에서 군인가족, 경찰가족, 공무원가족, 청년당원가족은 귀가시키고
남은 540여명의 노약자 어린아이 남자 여자를 구분하지않고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에서 700m 떨어진 박산 골짜기로 몰아넣고
기관총과 개인총기로 무차별 사살하고 나뭇가지를 덮어 불을 지른다.
뒷처리를 하기위해 대기시킨 주민 12명으로 하여금 희생자들이 모두 사망하였는지 확인하게 한 다음
다시 11명은 사살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문□□이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애원하자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위협한 뒤 철수하였다는 내용이 박산골의 학살이다.
입간판에는 문흥준. 장방달.신현덕씨가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고 적혀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 인민군의 낙동강 도강작전 중에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어 인민군의 북상이 차단되자 그 패잔병들은 지리산 등 산악지역으로 들어가서 공비가 되어
지리산 주변 민가에서 식량을 조달하며 후방교란작전을 하니.......
1950. 12. 공비소탕작전을 전담할 육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준장)을 창설하고 사단사령부를 전남 남원에 두고,
예하부대로 전북 전주에 13연대, 광주에 20연대, 경남 진주에 9연대를 배치하였으며,
9연대는 예하부대로서는 경남 함양군에 1대대, 경남 하동군에 2대대, 경남 거창군에 3대대를 배치하여 공비토벌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1951. 2. 초순경 9연대장 오익경 중령은 함양, 거창, 산청 등 지리산 남부에 출몰하는 공비 소탕을 위하여 함양에는
제1대대. 하동은 제2대대. 거창은 제3대대(대대장 한동석소령)으로 각각 담당구역의 공부를 소탕하면서
벌어진것이 거창군 신원면에서 자행한 양민학살사건이다
박산골 현장을 둘러 본다.
총탄자국이 남아 있는 바위이다.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묵념을 하였다
명복을 아니 빌수가 없었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혼령들이 아직 이곳에 있을꺼라고 생각했다.
한동석이라는 대대장이 이끄는 부대는 1951년 2월 10일 3개 리에서 끌고온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 교실에 몰아넣고
굶주림과 추위.공포에 떨고 있는 주민들에게 밤새도록 광란을 부리다가 날이 밝을무렵. 주민 517명을 박산골 골짜기로 몰아넣고
잔인하게 집단 살해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추모관에는 이렇게 학살했다고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희생장소 보존비앞에 있는 조경나무인데 음양의 형태를 만들어 놓았다.
무슨 의미가 있는것인지 아니면 장난스럽게 만든것인가.?
희생장소에서 바라본 풍경인데 이 얼마나 평화롭고 아늑한 시골풍경인가.
자리를 옮겨 희생자를 묻었다는 현장으로 갔다. 여기다.
새로만든 위령비를 살펴본다.
약간의 한문이 있기는 해도 한글로 적혀있어서 한결 읽기가 수월하다.
이은상선생이 글을 지었다고 적혀있다.
처음 세운 위령비를 516.군사정권때 파괴했단다
위령비를 무너뜨리고 글씨부분을 정으로 쪼아서 글씨를 지웠다.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남여와 아이들을 구분할수 없어서 유골의 크기에 따라 남여와 소아를 구분하였다고 한다.
남자들의 무덤.
여자들의 무덤.
희생된 아이들의 무덤.
당시 국회조사단이 1951.4.7.에 거창사건 현장을 답사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신성모 국방장관 등은 거창사건을 은폐하고자
국회조사단이 내려오기 4∼5일 전쯤에 3대대장 한동석으로 하여금 부하장병 100여명을 출동시켜 사건현장의 출입을 막고,
박산골 희생자 시체 가운데 윗부분에 있던 어린아이의 시체를 대충 가려내어
그 곳으로부터 약 2km 떨어진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홍동골로 옮겨 암매장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건너편에 위령탑과 새로 조성된 묘역이 있는곳이다
기록을 들추어 보니......... 국군이 자국의 백성들을 학살한것은 견벽청야작전이란것 때문으로 나온다
제11사단은 신설부대로서 훈련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게릴라전에 대한 경험도 부족하고
그 작전지역도 광범위하여 부족한 병력으로 공비토벌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곤란하였다.
이에, 제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은 공비토벌작전의 기본방침으로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반드시 확보하여야 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견고히 확보하고, 부득이 포기하는 지역은
인원과 물자를 철수하고 적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앰으로써 적이 발 붙일 수 없는 빈 들판을 남겨준다’는 것이었다.
작전 개시에 앞서 연대장 오익경 중령은 각 대대장을 불러 사단사령부에서 내려온 공비토벌작전의 기본방침인
견벽청야라는 작전개념과 구체적인 작전명령을 시달하였는데각 대대장들이 받은 구체적인
작전명령의 내용은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작전 수행 중 미수복지역에 남아있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 총살하라는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3대대장 한동석 소령에게 1950. 12. 5. 거창군 신원면에서 지서습격사건이 있었다는 사정을 알리고
그 일대를 공비오염지구로 보아 공비를 철저히 토벌할 것을 지시하였다.
위령탑.
거창사건의 희생자는 1951. 2. 9. 청연골에서 84여명, 1951. 2. 10. 탄량골에서 100여명, 1951. 2. 11. 박산골에서 517여명,
기타 지역에서 18여명으로 모두 719명이며, 연령별로는 10세 미만 313명, 11세∼50세 340명, 60세 이상 66명이었고,
성별로는 남자 327명, 여자 392명이었다고 적혀 있다
3대대장 한동석은 1951. 2. 7. 3대대 병력을 이끌고 거창농업학교를 출발하여 신원면에 진입하였으나,
공비를 발견하지 못하고 경찰과 청년의용대만을 남겨둔 채 연대합동작전을 위하여 산청방면으로 행군하였다.
그 다음날 연대장 오익경은 3대대를 찾아와 공비들이 신원면에 남겨둔 경찰과 청년의용대를 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3대대장 한동석에게 호된 질책을 하였고 연대장 오익경은 대대장 한동석이
위에서 지시한 구체적인 작전명령대로 작전을 수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이라는 질책에
이에 한동석은 3대대 병력을 이끌고 다시 신원면으로 돌아가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3대대는, 1951. 2. 9. 새벽 신원면에 들어와 거창읍으로 행군하던 중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 78세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 80여명을 눈이 쌓인 마을 앞 논으로 강제로 끌어내어 군용무기로 무차별 사살하였고
그 현장에서 어린아이 김△△만 어머니의 시체 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탄량 학살터
살펴본 기록에는. 거창읍으로 빠져나가 날이 저물자 재차 신원면으로 진입하여 내동마을과
오례마을에 주둔하던 중 다음날인 1951. 2. 10. 신원면 소재지로 이동하여 과정리,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에
병력을 투입하여 전 민가에 방화하고 대현리, 와룡리 주민들을 소개시킨다는 이유로 남아 있는 주민 중
노약자 20여명을 강변도로에서 사살하고, 뒤에서 끌려가는 노약자, 부녀자, 어린이들 100여명을 신원면 대현리
탄량골 계곡에 몰아넣고 역시 군용무기로 무차별 사살하고 나뭇가지를 덮어 기름을 뿌려 불을 질렀으며
그 현장에서 임△△만 살아남은 것 같으나 확실하지 않다,
전시장에 걸려있는 그림.
희생자명단.
사건발생 10년후 1960년 5월 17일 동아일보 기사이다
당시의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1951년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마을주민을 집단학살한 내용을 백과에서 좀 빌려왔다.
이 사건에 대해 부산 피난 국회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 의원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회의를 비공개로 요청한 후
거창사건을 공개했다.
국회는 신중목 의원의 보고 이후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국방·내무·법무장관과 함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출석을 요청해 진상을 규명하고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회에 출석하지 않고 국내 제반사항에 대해 거창사건이 해외에 보도되지 않도록 비밀리에 조사해
시정케 해달라는 서한만을 보냈다.
다음날 제55차 본회의에 출석한 장면(張勉) 총리와 조병옥(趙炳玉) 내무장관, 김준연(金俊淵) 법무장관,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거창사건의 진상을 둘러싸고 각각 엇갈린 보고를 한다.
1951년 3월 30일 본회의 의결을 통해 거창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거창사건특별조사위원회와 내무·법무·국방부가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파견하기로 의결했다.
4월 1일 오후 3시 조사단은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들이 내무부 차관실에서
위원회 조사단 활동에 따른 제반 문제를 논의한 후 4월 3일 신원면 사건현장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하기 전 조사단은 거창군 남상면과 신원면 사이 계곡에서 공비를 가장한 군인들의 총격으로
현장조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거창경찰서로 되돌아온다.
경남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은 매복한 9연대 수색중대 40여 명의
병사들에게 공비로 가장해 국회조사단이 올라오면 사격은 하되 사람이 맞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국회조사단은 거창경찰서에서 행정부 조사관과 국회조사관이 선정한 한동석 대대장을 비롯한
거창경찰서장과 형사, 신원면장, 그리고 신원면 현지 주민 등
모두 12명에 대한 증언조사를 벌였으나 김종원 대령의 방해로 사건의 실체는 밝히지 못하였다.
수사와 기소를 거쳐 군법회의가 열렸고 심리 끝에 12월 16일 선고 공판을 열어서,
강영훈(姜英勳) 재판장은 김종원 피고의 문서위조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공무집행방해죄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징역 7년 구형)을 선고한다.
9연대장 오익경은 살인죄와 군무불신임초래에 대해 유죄가 인정돼 무기(사형구형)를 선고받는다.
3대대장 한동석은 살인죄와 군무불신임초래죄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10년(사형구형)을, 이종대는 무죄(징역 10년 구형)를 선고받는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을 1년도 되지 않은 다음해 모두 특별사면했고 특히 김종원은 경찰의 간부로 등용되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화된 시기에 유족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고
유골을 한 곳에 모아 봉분을 만들고 위령비를 세웠다.
유족들은 1951년 2월 사건 발생 당시 신원면장이었던 박영보(朴榮輔)를 잡아 실신시키고
생화장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만큼 유족들의 분노와 한은 깊었다고 한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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