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전남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 495-1
식물에는 약용식물이 있다
하물며 인간중에 타인에게 가르침을 주고 배움을 주고 지식을 나누고자하는
약효가 있는 약용인간이 왜 없을까.
약용인간중에서도 대단한 약효가 있는 분 그분은 정약용 선생이시다.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한 사의재를 찾았더랬다.
사의재........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네 가지는 곧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을 말한다.
전라남도 강진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귀양지이다
그를 다시 회고해 본다 경기도 수원의 화성에서 나는 다산 정약용을 회고 했고
다산초당에서도 정약용을 회고 했었다.
정약용은 1789년(정조 13) 마침내 알성시에 급제해 첫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등의 언관이 되어 임금에게
여러 정책을 상주하고 간언을 하는 소임을 맡았다.
정조는 젊고 재기발랄한 정약용을 측근에 두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할정도로 그는 석학이었다. 당대의 실학자하면 정약용을 꼽는다
조선시대의 르네상스시절이라고 평을 받는 영조와 정조시대가 아닌가.?
정약용은 이서진이 주연한 이산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 정조가 왕일때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한다.
정조는 쌀뒤주속에서 죽은 아버지(사도세자)를 찾아 매년 몇 차례에 걸쳐
수원의 능행길에 올랐는데 이때 한강에는 배다리가 놓였다.
정약용은 이 배다리 설치를 맡게 되었고 이 일을 훌륭히 해냈다.
이어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수원성을 쌓을 적에
설계도와 기구를 만드는 일 또한 그가 맡았다.
그는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힘겹게 지고 올리는 것을 보고 기구의 발명에 골몰했다.
또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성의 거리, 높이 따위를 측량해
가장 튼튼하고 단단한 성을 쌓기 위해 연구했다.
마침내 그는 거중기와 활차(滑車, 도르래), 고륜(鼓輪, 바퀴달린 달구지)
따위를 발명해 성의 역사에 써먹었은 것이다.
이것은 수원성에서 정약용을 회고한 내용이다.
강진 군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의재가 있다.
영랑시인의 생가와 그리 멀지 않은곳에 위치해 있다
먼저 역사적 순서에 따라 사의재를 찾았더라.
천주교는 정약용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종교이다
1801년(순조 1)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탄압을 받고 있을 때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형제들도 끌려가 고문취조를을 받았다.
특히 형 약전과 약종이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그에게 집중적으로 심문을 퍼부었는데.
형관(刑官)들은 오고간 편지에 나타난 괴수가 형 약종이 아니냐고 물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상(堂上, 당시의 심문 담당관)이 그 편지를 보았다면 알 것이 아니오?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는 형을 증언할 수 없소이다.
나는 오늘 죽음이 있을 뿐이오. ······ 동생으로서 형을 증언할 수는 없소.
위증을 하면 임금을 속여서 불충이 되고 사실대로 말하면 형을 고발하는 불륜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불충불륜에서 벗어나지도 않고 결코 거짓도 아닌
명답이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형 약종이 죽고 매부 이승훈도 죽었으나 그는 살아남아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갈라지는 양수리 위쪽 마재는 정씨들의 세거지였다.
그는 세 형들 밑에서 여러 지식을 넓혔고
좀 더 자라서는 강 건너 양평에 사는 권철신에게 가서 학문을 익혔다.
광주에 사는 이가환에게서 학문의 깊이를 다지기도 했다.
권철신이나 이가환은 모두 당시의 쟁쟁한 실학자들이었고
성호 이익의 제자들이었다.
정약용은 이들에게서 성호학(星湖學)에 접근해
이익의 실학적 사상을 사숙하기 시작했다.
정약용의 실학정신은 이익을 사숙함으로써 단초를 열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이때 전해지는 말로는 정조는 영의정인 채제공의 뒤를 이을 인물로
장년층의 이가환, 청년층으로는 정약용을 꼽고 있었다고 한다.
1801년 신유박해에서 셋째 형 약종은 옥사했고 그는 둘째 형 약전과 함께 기나긴 귀양살이를 떠난다.
그리고 강진 사의재에 도착했다
농민의 참상을 시로 형상화한것 중에 이런시도 있다
그가 강진에 있을 적에는 양물(남자의 거시기)을 잘라낸
남편을 둔 지어미의 한탄을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제로 이렇게 노래했다.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 해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里正)이 호통해 단벌 소만 끌려갔네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 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말 · 돼지 거세함도 가엾다 이르는데 하물며 뒤를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이는 죽은 시아버지와 갓난아이까지 군적에 올라 있는 것을 본 지아비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현실이었다.
이것은 결코 허구가 아니었다.
이런 의식세계에서 산 정약용은 관리들을 이리와 승냥이로 빗대는
시랑(豺狼)이라는 詩를 썼다. 여기서는 몇 구절만 인용해본다.
장독에는 소금 한 줌 남지 않고 뒤주에는 쌀 한 톨 없노라
큰 솥 작은 솥 다 앗아가고 숟가락 젓가락 다 훔쳐갔네
자식 이미 팔려 가고 내 아낸들 누가 사랴. 내 가죽 다 벗기고 뼈마저 부수려나
부모여 사또는 고기 먹고 쌀밥 먹고 사랑방에 기생 두어 연꽃같이 곱구나
이 시에서 부모는 친부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벼슬아치를 말한다.
사의재앞에 있는 카페이다.
카페와는 관계없는 내용이지만 정약용은 술을 즐겼는데 술이 화기와 원기를 돕는 것으로 보았다.
자신이나 아들에게 ‘불급란(不及亂, 곤드레가 되도록 취하지 않는 것)’의
수준을 지키도록 했다. 이를테면 술을 약으로 본 것이다.
조선 후기 유배지를 중심으로 초의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문사들에 의해 음다문화가 형성되는데, 이것은 한국 음다문화의 기틀을 형성하게 된다.
초의와 사대부들과의 인연은 대둔사(大芚寺)에서 시작된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초의가 “다산을 따라 유서(儒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시를 배웠다”고 하였다.
초의선사와 다산은 24세의 나이차가 있다.
초의 선사가 24세의 어린 후배이다 그가 남긴 말이라는데......
스승을 모심에 유불선이 무슨 장벽이랴.
초의 선사는 다산을 불교와는 관계없이 인간적 스승으로 모신게 아닌가 싶다.
새로 조성되는 사의재 주변 조감도.
사의재와 가까운 영랑생가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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