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407. 통영. 미래사.

한유(閑裕) 2018. 7. 12. 20:53

407.

*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길 192

 

 

밀양에는 표충사가 있고 표충사는 사명스님 그리고 효봉스님의 흔적이 있는 인연의 땅이다

참. 특별한 땅이기도 하고 그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흩어진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표충사에는 서래각이 있다.

초대종정이신 효봉이라는 아주 큰 스님이 계신곳으로 유명하다

 

방상걸객이라는 이름으로 은산이 새벽길을 달려 찾은 미래사.

미래사는 표충사와도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효봉스님의 흔적이 있는곳이다.

그래서 찾았다.

미륵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미래사는 효봉(曉峰)스님의 상좌였던 구산(九山)스님이

석두(石頭), 효봉 두 큰스님의 안거(安居)를 위해 1954년에 세운 암자이다.

종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십자팔작누각(十字八作樓閣)이며,

 

 

 

삼층 석탑에는 티베트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가 봉안되어 있다.

 

 

 

미래사는 미륵산 남쪽의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은 효봉 큰스님의 상수 제자(上首弟子)인 구산수련대선사(九山秀蓮大禪師)가

6·25 전란 직후인 1954년도에 창건하였으며 주로 효봉 큰스님의 문도들이 주지를 하면서

차츰 키워온 선도량(禪道場)이다.

이 절 주지를 역임한 스님으로는 구산, 미산, 보성(菩成), 법흥, 종욱. 여진스님 등이다.

미래사 주위의 편백나무 숲은 전국 사찰 임야로써는 유일한 것으로서 70여 년 전

일본인이 심어 가꾸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가자 미래사에서 매입하여

오늘날의 큰 숲으로 가꾸어 온 것이라 한다.

 

 

 

 

아래 비석은  미투...........가 사실이라면

ㄱ시인이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고은의 이름이 있다.

조만간 없어지거나 이름이 지워질수도 있다

 

 

산내에는 효봉 큰스님이 만년에 계셨던 효봉암과 동암(東庵)이 있어

본분납자(本分納子)가 상주하고 있으며,

효봉 큰스님의 스승이신 석두(石頭) 화상과 효봉 큰스님의 부도와 비가 있고,

 

 

 

 

미래사의 다리에는 코끼리가 조각되어 있다.

 

 

 

 

 

종욱 스님은 낡은 대웅전을 헐고, 30평 규모의 웅장한 대웅전을 1985년에 새로 건축하였고

이어 조사전(祖師殿, 1987), 삼층석탑(1988), 요사 2채와 삼회문(三會門, 1989),

범종각(梵鐘閣, 1994) 등을 새로 지음과 동시에 도량을 정리하여 구산 스님이 창건한

당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새롭게 중창하였다.

또 차밭(茶園)을 마련하여 수만 그루의 차나무를 심어

옛날 우리 나라에서 성했던 차도(茶道) 보급에 앞장서고 있으며,

1986년에는 통영시 당동에 불교회관 여여원(如如院)을 신축하여,

주로 청소년과 어린이 등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포교하는 전당으로 삼아,

통영의 불교 발전에 기여하다가 1996년 입적하였다.

효봉암의  뒤에 석조미륵불상을 조성하여 신도들과 이 지역을 찾는 분의 참배처가 되고 있다.

 

 

 

 

 

 

특이 했다.

좌우벽면에 탱화가 있는 일주문도 있는가.?

 

 

 

 

 

 

 

종각도 특이하였다

 

 

절집에는 스ㅡ님이 계셔야 절집이다.

 

 

 

미래사와 관련이 있는 큰스님들.

 

 

 

이 절집에서 1954년 효봉 스님을 은사로 하여 입산출가한 분이

바로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스님이다.

 

 

 

절 내부를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본다.

 

 

도깨비 얼굴을 한 옹기

 

 

 

 

미래사 대웅전의 뒷풍경.

 

 

우물의 이름이 불유정.?

 

 

부처님이 주시는 젖인가 아니면 감로수인가. 생명수인가. 정화수인가

판단은 자신이 하는것이리라.

 

 

 

 

 

 

당연사항

 

 

 

효봉스님 비를 읽는다.

 

 


본관은 수안(遂安). 속명은 이찬형(李燦亨). 법호는 효봉(曉峰)·원명(元明).

법명은 학눌(學訥). 평안남도 양덕 출신. 아버지는 병억(炳億)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가야총림 초대 방장 및 통합종단 초대 종정을 지냈으며,

정화불사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하셨다.

 

 

 


1901년평안감사가 베푼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그 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일본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10년 동안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 평양의 복심법원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판사가 되었다

1923년 직책상 내린 사형 선고로 괴로워하다가,

엿장수로 3년 동안 전국을 돌며 참회와 고행을 한다.
1925년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의 석두화상(石頭和尙)에게서

38세로 출가하고 전국을 순례하며 정진한다.

1927년 금강산으로 돌아와서 참선하였는데,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아

'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30년 법기암(法起庵) 뒤에 단칸방을 짓고 용맹정진하다가,

1931년 도를 깨닫고 석두화상의 인가를 받는다.

 

1932년 사월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을 계사(戒師)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고,

1933년 여여원(如如院)과 마하연(摩訶衍) 선원에서 수행하였다.

이어서 전국의 적멸보궁을 찾아 한 철씩 정진하다가,

1936년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1937년 조계산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1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이때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1946년가야산 해인사의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어, 한국전쟁으로 총림이 흩어질 때까지 5년 동안 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1950년 부산 동래의 금정선원(金井禪院)으로 옮겼고,

1951년부터 1954년까지 통영 용화사 도솔암(兜率庵)에 머물렀다.

1954년 통영 미륵산 너머에 미래사(彌來寺)를 창건하여 머무르던 중,

8월 17일에 불교계의 정화불사운동(淨化佛事運動)이 일어났으므로

서울선학원(禪學院)에 머무르며 이를 지도하다가, 1955년 다시 미래사로 왔다.

 

1956년동산(東山)·청담(靑潭) 등과 함께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다녀온 직후,

조계종의 의결기구인 종회(宗會)의 의장에 취임하였고,

1957년 종무원장에 이어, 1958년 조계종 종정에, 1962년 통합종단 초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그 뒤 통영 미래사에 머물렀으나 건강이 나빠지자 치료차 다시 동화사로 옮겨

수행승들을 지도하였다.

1966년 5월, 거처를 밀양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겨 머무르다가

10월 15일 오전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대단한 스님들이 계신 이곳의 가피는 실로 대단한것이다

내가 이시간 이곳까지 오게 된 걸음걸이도 가피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마음이 편안하다

더 바랄것 없는 소박한 기쁨을 누린 미래사의 풍경이다.

 

 

'가고. 보고知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409. 천안. 일본넘들  (0) 2018.07.22
408.기장. 오랑대.  (0) 2018.07.20
406. 공주. 김옥균생가터.  (0) 2018.07.12
405. 고성. 적석산(積石山)  (0) 2018.07.10
404. 장성. 백암산 백양사.  (0) 2018.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