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426. 밀양. 작원관지.

한유(閑裕) 2018. 8. 30. 17:26

 426

*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 110.

 

삼랑진역 방향으로 매화로 유명한 원동방향으로 가다가  옆길로 빠지면

경부선 철길이 눈에 들어온다.

기찻길이다

그리고 부산으로 흘러가는 낙동강이 흐른다.

강과 철길은 가끔 이렇게 만나 같이 가기도 한다.

 

이쪽은 부산방향이고

 

 

 

이쪽은 삼랑진 방향이다.

 

 

 

작원관지라는 이름의 작은 건물이 하나 있다.

1995년에 새로 세워진 건물이지만 그 터는 유래를 가지고 있고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인것이다.

 

 

 

 

 


밀양시 삼량진읍 검세리에 있는 작원관(鵲院關)은 고려시대 이후

동 · 남 육로와 남 · 북 수로의 요충지로서 문경의 조령관과 함께

동래에서 서울을 연결하는 교통과 국방의 2대 관문 중 하나였다.

작원(鵲院)’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금작소전(金鵲所傳)’이라는 문자에서 취한 것이다.

김해와 밀양 등 낙동강 유역에 창궐하던 왜구의 침공을 방비하던 요새지였던 작원관은

작원진 나루터로 출입하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하던 원(院), 관(關), 진(津)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하니.당시에는 시끌벅쩍한 장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지금의 작원관은 언덕배기 아래에서 말없이 흘러가는

강가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그 존재를 확인하지 못할 위치가 아닌가 싶다

작원관은 육지로는 양산과의 경계이며 서울로 북상하는 교통 및

국방상의 첫 번째 요새지였다고 하는데

영남지방의 동서와 남북 요로상의 역원(驛院)으로서 여행하는

관원들의 숙박소 기능도 함께 했다고 적혀있다.

관방(關方)으로서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경비하고 방위하는 곳이었다는 설명에서

적은 누구겠냐 하는것이다

그들은 일본늠들.... 즉 倭敵인것이다.

지세를 살펴보건데 일본놈들은 낙동강을 따라 배가 떼거리를 이루며

삼랑진 방향으로 올라 왔을것이고 작원관이 자리해 있는 강변으로는 노략과 약탈.

살륙을 자행하며  부산포를 함략한 왜군들이 밀려왔을 것이다.

 

작원관.........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 장군이 이곳으로 몰려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막기 위해 제일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적으로 항전을 펼친 곳이다.

전투에 패한 후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1995년에 복원했다.

이에 앞선 1983년 7월 20일 작원관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되었다.

 

 

 

닭일까.? 봉황일까.

 

 

 

달랑 건물하나만 있었던것으로 기억 하는데 다시 방문했을때는

이런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라는 인물... 소서행장이라는 인물.......

아버지는 사카이[堺]의 상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밑에서

주요 관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 역시 도요토미를 섬겼으며 일본을 통일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수립하려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노력에 적극 참가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토요토미는 일본을 통일하게 되고 논공행상의 문제와 군벌의 힘을

빼야하는 상황에서 조선침략을 하게 된다.

 

1592년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로 결정되고 그의 부대는 조선 땅에 맨 처음 상륙한다.

조선의 남부지방 대부분과 평양성까지 점령하는 등 처음에는 계속 승전하여

이름을 떨쳤으나 고니시의 부대는 처음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조선·중국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기 시작한 상황에서, 일본국 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는다.

 

그는 귀국하여 후계자 결정을 둘러싼 내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 내란의 와중에 그는 참패를 하게되고 활복하여 자결할것을 요구 받았으나 거부한다.

카톨릭 신자였다는 그는  자결을 하지 않고 1600년 11월 6일 교토에서 처형당했다.

카톨릭신자라는 인간이 왜 전쟁터의 선봉장이 되었나.

종교전쟁....... 십자군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 소서행장군대와 일전을 벌인 박진은 누구인가.


무신 집안 출신으로 1584년(선조 17) 무과 급제,

비변사(備邊司)에서 근무하다가 1589년 심수경(沈守慶)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에 밀양부사가 되었다.

같은 해 4월에 왜적이 침입해 부산·동래를 함락하고 북상한 적을

작원(鵲院)에서 맞아 싸우다 패해 포위되자,

밀양부(密陽府)를 소각하고 후퇴하였다. 이후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나머지 병사를 수습하고, 군사를 나누어 소규모의 전투를 수행해 적세를 저지하였다.

같은 해 8월 영천의 민중이 의병을 결성하고 영천성(永川城)을 근거지로 해서

안동과 상응하고 있는 왜적을 격파하려 하자, 별장 권응수(權應銖)를 파견,

병사들을 지휘하게 하여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이어서 안강에서 여러 장수들과 회동하고 16개 읍의 병력을 모아 경주성(慶州城)을

공격했으나 복병의 기습으로 실패하지만. 군사를 재정비하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해 경주성을 다시 공략해 많은 수의 왜적을 베고 성을 탈환하였다.

이 결과 왜적은 상주나 서생포로 물러나야만 했고, 영남 지역 수십 개의 읍이

적의 침략을 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전공으로 멍청하고 비겁한 왕인 선조로부터 양피의(羊皮衣)가 특별히 하사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계급장을 받은것으로 되어 있다.

임진왜란 초기 왜적과 싸운 장수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의 하나였다.

 

그 당시를 회고한  기념탑을 조성해 놓았다.

 

 

 

나라안 어딜가나간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우리나라에 긍정적으로 남긴 문화와 기록은 없다

파괴와 방화 약탈등 못된짓은 골라서한 민족이란것을 알게 된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지천에 깔린 일본과의 이야기는 널리고 깔려있다.

 

삼랑진의 작원관지도 그런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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