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
*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는 것. 즉 움직이는 모든 것은 항상 그렇지 않고 소멸한다는 이치를 담은 말이 제행이 무상하다는 뜻이다..
여민루는 아산현의 문루로 지어졌던 건물로서 현재 영인초등학교의 담장에 붙어 있다.
1411년(태종 11)에 현감 최안정(崔安正)이 현감으로 근무할 당시 진주하씨인 영의정 하륜(河崙)의 권유로
정이오(鄭以吾)가 루(樓)의 기문(記文)을 썼으며,
누의 이름은 하륜의 “백성을 위하는 뜻을 취하여 여민(慮民)이라 이름하여 지었다는 여민루이다
백성을 위하는 뜻을 취한다는 여민루..........
김옥균 선생의 무덤이다
거사 당일인 10월 17일 저녁 7시 우정국개국축하만찬회가 우정국청사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우정국 총판(總辦) 홍영식, 박영효, 독판(督辦) 김홍집(金弘集),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
우영사(右營使) 민영익(閔泳翊) 등 개화당과 사대당 인물들, 그리고 주한외교사절들이 참석하였다.
경비가 심하여 안국동 별궁에 대한 방화는 계획대로 시행하지 못하였으나, 대신 10시경 우정국 북쪽에 있는
민가를 방화함으로써 거사에 돌입하였다.
그 중심에 김옥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옥균은 충남 공주 정안의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병태(金炳台)는 시골에서 헛기침정도하는 양반 후예로 겨우 생활을 꾸려나가는 처지였다.
김옥균의 가계는 김상용(金尙容)을 중시조로 꼽는다.
김상용은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했고,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金尙憲)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청나라와 싸우기를 주장한 척화파의 거두였다.
그 김상용의 후예가 김옥균이다
이와 달리 김상헌의 후예는 문벌세도정치를 주도하여 서울에서 큰 세력을 잡고 흔들었다.
김옥균은 여섯살 적에 종숙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갔고, 이로 인해 서울에 와서 살았다.
서울대 출신도 아닌데도 김옥균은 스물둘에 문과에 장원급제했을 정도로 머리가 뛰어났다는 야그이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천재였다.
그이 묘. 하단부분이다.
부인은 포항근처에 있는 기계. 그러니까 본향을 기계에 둔 기계유씨가 본 마누라이다.
일본인 여자를 부인으로 두고 자식까지 있지만 정경부인만 비문에 올라간다.
생부 김병태는 즉시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옥사하고,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대구 감영에 투옥되었다가 옥사하였다.
생모 송씨와 여동생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아내 유씨부인은 7세된 딸과 함께 노비로 분배된다.
살아남은 그의 첩 송씨는 옥중에서도 음행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島)에 유배된 데 이어 1888년 8월~1890년 4월 홋카이도에 연금을 당한다.
그는 이 무렵 두 명의 일본인 게이샤와 연인관계였는데, 이들 게이샤들은 김옥균이 자주 출입하던 술집에서 만나게 되어
그의 금전적, 정신적 후견인이자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당시 김옥균의 후원자였던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의 저서 ‘33년의 꿈’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1894년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가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 후 도쿄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참석했다.
미야자키가 장례식장 한구석에서 슬피 우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자
“나는 여인의 몸. 선인(先人·김옥균)의 사상은 모르지만, 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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