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314. 금산. 이성계 태실.

한유(閑裕) 2018. 5. 29. 06:53

314.

*   금산군 추부면면 마전리 산 1-86 (추부터널 위)

 

이성계.  조선조 초대임금이다.

이성계는 1335년 영흥에서 아버지 이자춘(李子春)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며 전주 이씨이다.

왕이 된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고 나와 있다

 

제목은 웅비의 소리라 해 놓았다.

감상에 들어간다

여성상은 금산아가씨가 확실하고 형상은 인삼과 결합하여  힘차게 날아가니 웅비의 소리라 한것 같다

만고 내 생각이지만 인삼의 효능을 극대화 하기위한 예술작품이 아닌가 싶다.

태조 이성계의 태실로 가는 입구에 있다.

아이야. 먼저 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넘의 유적지 답사가 뭔지 여름날씨는 움직이기만 해도 땀이나고 덥기만 한데 

나는 조금만 가면 있을꺼란 기대를 하며 한계단 한계단을 올라간다.

길을 올라가면서 그의 아들들을 생각해 본다.

특히  다섯번제 아들인 이방원.

이성계 자신이 인간 백정이라고 한 아들 이 방원은 나중에 태종이 된다

그리고 그의 손자중 한명은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다 

조선이라는  왕조를 개국한 드라마는  스펙타클 그 자체이다

여러번 구비돌아 땀을 딱아가며 올라가니 산 능선위의 평지길이 나타난다

이쯤해서 태실까지의 거리라도 쫌 안내해 주는 푯말이라도 세워두면 안되나 

에그------- 이 길을 약 10분쯤 더 걸어가니...........

드디어 이성계의 태실이 나온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의 귀천이나 계급의 고하에 따라 다르다.

특히 왕실인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태실은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는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가봉될 것을 감안,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를 태실까지 봉송하는 절차와 봉안하는 의식도 까다롭다.

왕자나 공주·옹주가 태어나면 태를 봉안할 장소를 관상감(觀象監)에서 물색하고

및 개기(開基)·봉토(封土) 등의 날을 가려 정하였다.

선공감(繕工監)에서는 태를 봉송할 도로를 수치하고 역사에 지장이 없도록 대비한다.

 

태실의 역사를 마치면 토지신에게 보호를 기원하는 고후토제(告后土祭)· 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

사후토제(謝后土祭) 등의 제례를 치른다.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킨다.

금표를 세우는 범위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하였다.

관할 구역의 관원은 춘추로 태실을 순행해 이상유무를 확인한 뒤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태실을 고의로 훼손했거나 벌목·채석·개간 등을 했을 경우에는 국법에 의해 엄벌하도록 정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태실이 가장 많은 곳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서진산(棲鎭山)으로 조선 왕실(세종이 낳은 왕자) 13위의 태실이 있어 세칭 태봉이라 한다.

 

역사공부는 이래서 흥미롭다.

어릴 때부터 장대한 기골과 총명함을 자랑하던 이성계는 무예, 특히 궁술에 뛰어났고.

힘이 좋아 남보다 갑절은 무거운 활과 화살을 쓰면서도 빗나감이 없어 명궁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훌륭한 조력자가 되었으며,

이자춘이 병마사가 된 지 4년 만인 1360년(공민왕 9) 병으로 죽자

뒤를 이어 동북면의 세력가로 떠오르게 된 인물이다.

북방을 지켜오던 이성계는 1376년(우왕 2)에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왔다.

당시 일본은 내분을 겪어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진 일본의 일부 영주들은 무사들을 이끌고

고려나 중국 해안을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성계는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고려의 백성을 괴롭히다가 충청도까지

올라온 왜구를 지리산 일대에서 물리쳤다.

특히 1380년(우왕 6)에는 아기바투(阿其拔都)가 이끄는 왜구가 함양과 경산,

상주까지 올라와 노략질을 했는데, 이성계가 이들을 운봉에서 맞아 섬멸했다.

이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운봉에 가면 피바위가 있다

이성계가 적장을 화살로 쏴 죽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투에서 최무선(崔茂宣)이 화약과 화통을 이용한 포를 개발해 처음 사용하기도 했다.

위하도 회군........

이성계는 일단 왕의 명에 따라 조민수와 함께 5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정 길에 올랐다.

이성계와 조민수의 부대는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위화도(威化島)에 당도했다.

그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요동성을 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때는 5월이었고 장마로 압록강이 불어나자 도망병이 속출했다.

이성계는 이대로 정벌에 나선다는 것은 자멸의 길이라 여겼다.

더구나 친명파로서 명을 친다는 것은 명분에도 맞지 않았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감행했다.

역사를 뒤흔들 사건의 시작이었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우왕을 친위하는 최영의 부대와 싸워 승리를 거뒀다.

이렇게 이성계는 정권을 장악했다.

싸움에서 진 최영은 고봉현(지금 경기도 고양)으로 귀양갔다가 처형되고

우왕도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고 이후 어찌 어찌 결국 고려는 망하고 조선이 개국된다

그리고 이성계는 초대 조선의 국왕으로 취임하게 된다.

 

현장답사를 하면 더욱더 확실하게 이야기가 다가오니 현실적이 이야기가 된다

이맛에 땀을 흘려가며 운동한다 생각하고 산에 오르고 들을 넘고 

먼길을 가는것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고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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