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258. 평택. 원균장군의 묘

한유(閑裕) 2018. 5. 18. 05:16

258.

*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산82

 

이순신 장군

조선조 임금들 삼십명의 장점만 가지고 한 인물을 만들어 내어도

결코 이순신장군의 케릭터에 유사한 인물을 만들수 없다고 본다만

 

이순신장군과 원균장군과는 뗄래야 뗄수없는 임진왜란이란..........

즉 왜놈과의 전쟁역사에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남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순신장군의 유적지는 즐비해도

원균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는것도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과는 상대성이 있어서 과소 왜곡된 인물로 묘사되지만

원균장군도 대단한 사람인것을 원균장군의 묘에서  간파할수 있었다

.......갔다  원균장군의 묘를......... 

아니 가보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인물의 묘이기 때문이다

 

원균은

이름은 균(均)이요,

자는 평중(平仲)이고, 성은 원주 원(元)씨이다

 

왜적들은 여러번의 해전에서 패배하여

군수품을 보급이 어려워지자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은 계락을 쓰게된다.
소서행장은 꼬봉인 왜인간첩 요시나(要時羅)로 하여금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김응서에게로 왕래시켜 신임을 얻게한다

그러다가 정유년(丁酉年:1597년)에 이르러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다시 출전하게 됨에따라,

왜놈간첩인 요시나가 은밀히 김응서에게 와서 말하기를

"두 나라가 화의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은 오직 가등청정 때문이며 이로 인하여,

소서행장은 가등청정을 미워하는 바이니 정보를 준다하며.

만일 바다 가운데서 지키고 있으면 능히 생포할 수 있을 터이니

신중히 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라"하였다.

요 말에 속은 경상우수사 김응서가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은밀히 알리고 출전토록 하였는데

이순신장군은 나름대로의 정보를 접하고서 적의 계략인것으로 생각하고 출전을 거부한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머뭇거리고 출전치 아니하니 군기를 그르치게 했다며 조정으로 잡아올려

투옥하고, 이해 3월 전라병사로 있던 원균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순신장군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원균장군은

조정으로 부터 부산 앞바다로 공격해 들어갈 것을 지시받지만

적의 동정을 살핀 즉 적은 계략을 써서 우리를 속이고 있는것을 알아내고

부산 앞바다로 상황상.공격해 들어가지 못하는 뜻을 올렸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듣지 아니하고 부산진으로 출전하여 왜적의 함선을 무찌를 것을 지시한다.
원장군은 다시 계를 올려 꼭 부산 앞바다로 들어가야 한다면 안골포에 주둔한 적을 먼저

육지에서 육병으로 하여금 몰아낸 후에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옳겠다고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듣지 아니하고 종사관 남이공을 보내어 출전할 것을 재촉한다.

 

그 해 7월 초에 왜장 소서행장은 또다시 첩자 요시나를 경상우수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왜선이 바야흐로 바다를 건너 온다는 연락이 있으니 방비가 없는 틈을 타서

수병으로 공격하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속여 말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도원수 권율장군은 수군통제사 원균으로 하여금 속히 출전하여 적과 싸울것을 재촉하는지라,

원장군은 웅천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싸워 이기고 있는 상황이지만.

계속 강해지는 왜군의 군세를 본 원장군은 구원병을 청하여 다시 공격하고자

우선 군사를 물렸는데, 권율장군은 공이 머뭇거리어 기회를 잃었다 하여

원균장군을 잡아 들여 곤장을 쳐서 나무랬다.

이에 원균장군은 일이 돌이킬 수 없이 잘못 되어가는 것을 알았으나,

원수부(元帥府)에서 곤장도 맞고한 사실도 있는지라 거역하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함선을 거느리고 곧 바로 부산 앞바다로 공격해 들어가게 되고.....

 

이때 왜군의 전략은

도망가는 척하고 조선군을 유인하는 작전을 사용하였는데

패하여 도망가는줄만 알고

조선수군은 적을 쫓아 공격해 들어가다보니, 너무 적진 깊숙히 들어간것이 화인이되었다

 

원장군이 급히 이를 깨닫고 배를 돌려 퇴군하려 할 때는 이미 늦어버린 상황이된 것이다

적은 우모든 병선을 다모아서 나는듯이 마구 쳐들어오게 되었다

우리 수군은 영등포로 퇴각하였으나, 왜군은 은밀히 가벼운 배를 영등포 섬쪽에 보내어

잠복해 두었다가 조선 군사가 영등포로 퇴각하는것을 보고 왜군은 총포를 쏘며

사방에서 나타나니 조선군은  황급히 항구를 떠나 온나도로 후퇴 하였다

이날 원균장군은

오늘은 오직 일심(一心)으로 순국할 따름이니라"하였다.

 

적선이 사방에서 공격해오고 탄환이 비오듯 날으며 고함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적세가 너무 강하여 대항하여 싸울 수 없는 형상이 되니.
경상우수사 배설이 먼저 닺을 거두고 달아남에 우리 수군의 전열은 무너지고 말았다.

원장군은 할 수 없이 배를 버리고 연안으로 올라갔는데 적이 따라와서 목을 베어갔다.

 

때는 정유년(1597년) 7월 16일이니 원균장군의 나이 58세였다.

국회의원 원유철이 원균장군의 후손이라내 

묘에는 원균장군의 시신을 묻은것이 아니고

원균장군의 말이 원균의 전사함을 알려주기 위하여

천리를 달려와 원균의 생가에 도착하여 신발과 담뱃대를 놓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에 원균의 죽음을 알게된 집에서는 신발과 담뱃대로 원균장군의 묘를 만들었다고 하며

말을 장군의 묘소 아래쪽에 안장하였다 한다

 

 

 

 

 

 

 

 

 

 

 

 

 

 

 

 

 

원균장군의 묘에서 바라본 풍경

 

 

 

 

 

 

 

원균장군의 묘뒤에 있는 마을

 

 

 

 

 

 

 

 

 

 

 

평택에가니 이런 주유소도 있더라.

 

 

 

 

'가고. 보고知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0. 보은. 법주사조각공원  (0) 2018.05.18
259. 남원. 궁장현전투전적비  (0) 2018.05.18
257. 울진. 사랑바위.  (0) 2018.05.18
256. 김해. 장방리 갈대집  (0) 2018.05.18
255. 공주. 공산성  (0) 2018.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