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
*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조선조 역사에서 가장 비겁한 왕, 그가 선조이다.
그 비겁하고 졸렬한 왕의 막내 아들이 바로 영창대군이다
어린 나이에 역모죄를 뒤집어 쓰고 뜨거운 방구들위에서 증살된 왕자인 영창대군.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에 있는 그의 무덤을 찾았더랬다.
조선의 가장 비겁한 왕인 선조에게는 후궁 소생인데다가 장남도 아닌 광해군이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어 있는 마당에 아들인 광해군보다 아홉 살 어린 계모 인목왕후仁穆王后로부터
적장자인 대군이 태어났다.
적장자는 왕위승계의 일순위인데 이미 왕세자로 있는
광해군에게는 그간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세상에는 시대를 잘못타고 태어나면 안되는 생명들이 있다.
선조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영창대군은 나라를 위해서나 왕실을 위해서나
태어나지를 말아야하는 생명이었다.
어린 영창대군의 묘이다.
이처럼 영창대군은 탯줄에 묻은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조정분란의 한가운데로 내몰리며
왕세자 광해군의 강력한 정적이 되어버렸다.
그는 조선왕조 제14대 국왕인 선조의 열네 번째 막둥이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 선조의 나이 쉰다섯 살,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왕후의 나이 스물세 살,
왕세자 광해군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단종과 더불어 조선왕조 사상 가장 참혹하게 생을 마감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손꼽히는
영창대군을 선조는 그나이에 아이를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불운에 찬 삶이 운명지워져 있었다.
광해군 5년(1613) 4월 좌변포도대장 한희길이 문경새재에서 일어난
은상(銀商) 강도살해사건의 범인 박응서를 체포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얼마 후 박치의를 제외한 나머지 공범도 모두 잡혔는데 그 면면이 예사롭지 않았다.
심우, , 박치인, 이경준, 김등 하나같이 명문대가 집안의 서자들로
서얼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출셋길이 막힌 처지를 비관하다 의기투합해 자칭
강변칠우라는 사생계를 조직해 어울려 다니다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보고를 접한 천하의 간신배인 이이첨은 즉시 한희길과 심의관 정항을 불러
거짓 역모를 꾸밀 것을 사주했고
이에 한희길이 먼저 잡힌 박응서를 회유, “김제남의 주도하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거짓고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서양갑으로부터 거짓자백을 받아내 광해군의 친국까지 마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역모에 연루되었다고는 하나 이제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죄를 묻기에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지라 세상 여론도 전은론으로 들끓었고
광해군 자신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칠게 없었던 이이첨 등이 집요하게 광해군을 다그쳐 마침내 광해군 5년 5월 30일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궁궐 밖 어느 민가에 구금시키고 만다
광해군이 일단 한 발 양보하자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창대군이 역모사건과 무관한 것은 광해군도 잘 알지만
그 사건을 기화로 돌이킬 수 없는 악연을 맺게 되었으니
장차 영창대군이 세상 물정을 알게 될 때가 되면 앙심을 품고 무슨 일을 꾸밀지
장담할 수 없게 된 이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해 8월 2일 임해군 때 그랬던 것처럼 영창대군을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고
그 다음해인 광해군 6년(1614) 2월 10일
열살도 안된 어린아이인 영창대군은
방에 가두고 불을 넣어서 쪄 죽이는 증살(蒸殺)이라는 참혹한 방법으로 죽게 된다.
이때의 강화부사는 계축옥사 조작에 일조했던 정항이었고
위리안치된 영창대군의 감시책임자인 수직무장은 임해군 때 일개 수장으로 있다가
직접 임해군을 목 졸라 죽인 이정표였다.
영창대군이 병사했다는 거짓보고를 받은 광해군은 무참하게 살해당했을
어린 막내 동생에 대한 연민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임해군 때와 마찬가지로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했다.
영창대군의 어미이고 선조와 혼인한 인목왕후...............
그녀는 사실상 대비전에 감금된 채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에 몸부림치며 통곡했지만 이미 벌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제는 인목왕후와 철천지원수가 된 광해군은 인목왕후를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 자리에 계속 앉혀놓을 수가 없었고
여론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광해군 10년(1618) 1월 후궁격인
서궁西宮으로 강등시킨 뒤 유폐시켰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3일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다시 복위는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고 난 뒤였다.
피붙이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제주에 유배되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던
친어머니 노씨 부인과,
죽었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리고서 절에 의탁한 덕분에 살아남았던 조카 한 명,
그리고 친딸 정명공주뿐이었다.
멸족이었다.
아이 하나가 세상에 태어나므로 인하여 역사의 한토막은 피로 적셔진 것이다.
인조 10년(1632) 6월 28일 인목왕후가 그의 한 많은 삶을 되돌아보며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지 말아라”는 유언을 친정집에 서신으로 보내고 눈을 감았는데
그 이후로 연안 김씨는 구한말 연안 김씨 집안의 김덕수가
조선왕실의 마지막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의친왕과 혼인할 때까지
왕실사람과는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석양이 물들어가는 영창대군이라는 어린아이의 묘에서
권력이 뭐며 삶과 죽음이 믄가라는 화두를 살피며 동자석을 바라본다
원래는 남한산성 아래에 있는것을 1971년 8월에 이곳으로 이장했단다.
멍청한 임금. 선조는 죽기전에 이렇게 될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고 아이를 낳았단 말인가.?
내가 다 탄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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