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명성황후는
1851년 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서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황후이다.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明成太皇后).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이다.
왕후는 어려서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효경》·《여훈》
(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민비 탄강 구리비(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영조가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명성황후생가앞
식수대로 기억한다
본관이 여흥민씨인 자영은
1866년(고종 3) 3월,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고종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했고,
1871년 자신이 낳은 첫번째 왕자를 5일 만에 잃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불화는, 대원군이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 소생의 완화군(完和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1873년(고종 10)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한 명성황후는 앞서 대원군을 탄핵한 바 있는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삼고, 그해 10월 26일 그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소(疏)를 올리게 했다.
이때 조정의 의견이 서로 달랐지만 그녀는 최익현을 감싸고,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원군은 양주 곧은골[直谷]로 물러나게 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
1885년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을 일으키자,
묄렌도르프를 통해 영국과 교섭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했다.
이에 청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의 환국을 주선하여
민씨척족 세력과 정권다툼을 벌이도록 유도했는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그녀는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본에 대항했다.
더욱이 3국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러시아의 힘을 과신하여 친러경향을 더욱 굳혔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조선병합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던 명성황후와
그 척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가장한 와타나베 대위의 일본군인들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게 하고 명성황후를 불법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의 글씨
명성황후는 대원군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유배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
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그녀를 비롯한 민씨척족은 이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기울었고,
개화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1884년(고종 21)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다시 청의 도움으로 이들을 제거했다고 한다.
경기도 양주 숙릉(肅陵)에 묻혔고, 1897년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다.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인 토오 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 중에 하나로,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 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
명성왕후를 절명시킨 장본인인 토오 가쯔아끼는 뒷날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명성왕후를 시해할 당시 직접 사용한 칼을 일본 쿠시다 신사에 맡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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