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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밀양. 김종직생가와 예림서원.

한유(閑裕) 2018. 6. 10. 08:13

354.

* 경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와 제대리

 

 

김종직 선생의 생가 풍경이고.......

 

 

 

예림서원이다.

 

 

.

 

 

서원이라는것이 지방의 교육기관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유교(성리학)의 중심인물을 배향하는곳이 아닌가.

 

 

 

조의제문.

이걸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무오사화에관한 기록이다.

 

 

 

김종직선생의 삼대제자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이다

 

사화는 사초가 문제가 되어 일어난 환란이다,

무오 . 갑자. 기묘 을사.사화이다.

무오사화(1498, 연산군 4)·갑자사화(1504, 연산군 10)·

기묘사화(1519, 중종 14)·을사사화(1545, 명종 즉위)를 말한다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숙자(叔滋) 어른이시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년에 일어난 사화로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예림서원 독서루.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에 출생하여 1492년 8월 19일에 사망한 정치가이며

학자인 그는 성리학자이며 사상가이고 시인이기도 하다

선산김씨인 그가 밀양의 대표적 역사인물로 남기까지 그의 공과는 크다

세조때에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일두 정여창을 비롯하여 김굉필. 이목. 김안국. 김정국. 권경유. 김일손등

굵직한 이름들을 남긴이들이 그의 제자들이다

그 유명한 조광조 선생은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도 그의 문하생이다

 

 

 

 

 

1489년에는 공조참판·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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