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
만정 김소희 . 미당 서정주생가와 그리 멀지 않는곳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고려대학교를 세운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있다. 이번 고창여행의 마지막 기록이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와 수당 김연수 형제가 태어나고 성장한 장소이다.
김성수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었으며, 정치, 언론, 교육,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한국 근대사에 영욕의 족적을 남겼다.
인촌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대한민국 초기까지 활동한 사업가·언론인·교육자·정치가.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인촌(仁村) 김성수는
전라북도 고창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근대적 기업을 설립, 운영하고 각급 학교와
언론사 운영을 통해 민족의 자립과 민족 정신의 고취를 위해 노력했으며, 언론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 등이었다.
1915년 4월 운영난에 시달리던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에는 경성방직회사(京城紡織會社)를 창립하여 민족자본 육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듬해 4월, 3·1운동을 계기로 형성하기 시작한 민족주의를 육성하면서
일제에 항거한 민족의 대변지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계몽에 힘썼다.
일제의 언론탄압으로 동아일보사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 사재(私財)를 털어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존경받는 인물들이었다
인촌은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지만 수당 김연수는 일제강점기 경성방직 사장, 삼양사 사장을 하였고,
한국경제협의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한 기업인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왜정 말기엔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하고 만다.
경성부에 국방헌금 1만 5,000원,
황군위문금 5,000원을 헌납했다.
1938년 11월 만주 펑텐[奉天] 동광중학교에 1만원과 경성군사후원연맹에 3,000원,
12월에는 일본 해군에 1만원을 기부했다.
10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사업자금으로 3만원을 헌납했고,
12월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박물관건설비로 1만원을 냈다.
1942년 1월 4일 일본군의 마닐라 함락을 기념하여 삼양사 4만원,
경성방직 4만원, 중앙상공주식회사 1만 5천원,
삼양상사주식회사 5천원 등 10만원을 모아서 국방자재비로
조선군사령부와 해군무관부에 각각 5만원씩 기부했다.
같은 해 6월 매일신보사가 일본군에게 일장기 부채를 보내자는 운동을 벌이자 부채 2천개를 보냈다.
그 대가로 1940년 9월과 1942년 3월 2회에 걸쳐 일본정부가 주는 감수포장(紺綬襃章)을 받았다.
1930년대 당시 1원의 법정 평가는 금 0.2돈이었다. 즉 10원이 금 2돈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10만원의 금액이면 금이 얼매나 되는지 내머리 계산으로는 가방끈이 짧다
울산김씨를 빛낸 인물이라는 증거.
1932년 3월에는재정난에 빠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인수했다.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들어 두 형제가 친일 앞잡이 행각에 나서면서 후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고,
대법원에 의해 친일 행적이 인정되면서건국훈장의 서훈이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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