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 옥천. 구진벼루
576.
* 충북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서화천변
백제 26대 성왕이 죽은곳이 '구진벼루'이고 이것이 그 유적비이다
기록에는 554년, 진흥왕의 신라군은 옥천 관산성 인근 구진벼루에서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했다는 곳이 여기 이자리라는 것이 아닌가.?
553년 신라 진흥왕은 군사를 돌이켜 한강 하류지역마저 손에 넣고 말았다.
나제동맹이 끝장난 것이다. 격분한 백제 성왕은
이듬해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러 나섰다.
이리하여 벌어진 싸움은 신라의 북쪽 국경인 여 이 앞산에 있는 관산성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백제군은 첫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보병과 기병 50여 기를 이끌고 밤중에 구천을 지나가던 성왕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사로잡힌 후 죽임을 당한다.
신라군은 성왕의 목을 베어 몸은 백제로 돌려보내고 머리는
신라 궁성 북청의 계단 아래에 묻었고 왕래하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했다고 한다.
성왕이 잡힘으로써 백제는 3만 명 가까운 군사를 잃고 전쟁에서 완전히 지고 말았다는 장소가
바로 이곳인 구진벼루인 것이다.
구진벼루는 충북 옥천군 월전리에 있고, 구진벼루의 원 뜻은 '굽은벼랑'이라는 말의 방언이라 한다.
위치는 월전리 외곽 서화천변이니 바로 이 위치인 것이다.
또는 전하여 오는 말이라 부정확하지만 구진(구천)에 있는 벼루(바위)라고 해서
구진벼루라 하기도 했다카네
지금의 사람들이야 알겠냐마는 이곳 이 일대가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인 DMZ인 것이다
예로부터 이곳이 군인들이 주둔하던 곳이라고 해서 군전(軍田)이라고 했고,
옆쪽에 다리골(月谷)이라는 곳과 합쳐져서 지금의 지명은 월전리(月田里)라 칸다네
마을 유래비를 읽어보니 이곳이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란다
백제성왕의 이름은 명농(明穠).으로 그 유명한 고분으로도 이름날린 무령왕의 아들이다.
〈니혼쇼키 日本書記〉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나온다는 그는.
538년에 단행된 사비 천도는 왕권강화를 위해 단행한 것이었다.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하여 부여족의 전통을 강조했으며,
내외의 관제를 정비하고 집권적 통치질서를 확립했다.
국제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중국의 양(梁)나라 및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달솔 노리사치계를 통해 불교를 전파했으며,
의박사· 역박사 등의 전문가를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전수해주었다.
그리고 신라와의 동맹관계도 강화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차단하고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의 회복을 도모했다만
553년 신라의 배반으로 한강하류지역을 다시 신라에 빼앗겼다.
이에 뿔다구가 하늘로 쏫아난 성왕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신라정벌에 나섰다가 554년에
이곳 관산성싸움에서 전사하고 백제군도 대패했다는 전설의 땅이 이곳 구진벼루라는 야그이다.
적대관계가 된 신라와의 전쟁에 국력을 낭비함으로써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이곳에 흐르는 개울에는 시체가 둥둥뜨고 핏물로 붉었을 것이다만
세월은 그 옛이야기들을 싰어내고 금강으로 흘러가고 있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이 작은 개울가로
성왕은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왕자 여창(위덕왕)을 위로하고자
직접 보기(步騎) 50여 기를 거느리고 야간에 구천(狗川: 지금의 이곳)에 이르렀는데,
신라 복병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그 사실을 후인들에게 알리고자 비석하나가 덩그라니 서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