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 금산. 천내리 용호석
602.
*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1006 - 45
충남 금산은 인삼의 고장이다
인삼은 해방 후 남한 생산의 95%를 독점했으나, 현재는 그 생산이 감소되는 추세에 있단다.
전국의 인삼 80%가 거래된다는 금산이다
여기 금산의 천내리 용호석은 고려 후기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피난내려온 공민왕이
자신의 능묘 위치를 정하여 필요한 석물을 준비토록 하였던 것이 이 자리에 위치해 있다
왕이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자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 1330~1374)과 그의 부인인 노국공주(魯國公主) 사이의
로멘스를 세기의 사랑이니하며 떠벌라는 사람들이 많다
원나라 출신으로 고려의 왕비가 된 몽골여인은 제25대 충렬왕부터 제31대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동안 7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녀들은 때로는 국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지만 정략결혼의 희생자로서
고려에서 왕인 남편에게 외면당한 채 외롭게 생을 마감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하는데
노국공주는 남편 공민왕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직접 공주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하지 않는가.
고려를 새롭게 일신하고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공민왕은
1352년(공민왕 원년) 8월에는 자신이 고려 국왕으로서 직접 정무를 총괄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하고,
무신정권 때 설립된 정방을 폐지하고 호복과 변발을 금지했다.
몽골식 복장과 머리모양이 78년 만에 고려 방식으로 환원되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에게 있어서 다정다감한 최고의 남편이었지만 정적들에게는 냉정한 승부사였다.
성품이 시기가 많고 잔인하여 심복인 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반드시 시기하여 그를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니 나름대로 완권을 강화한 인물이 공민민왕이 아닌가 한다.
원나라에서 왔지만 노국공주는 이와 같은 남편의 개혁과 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한다.
공민왕은 결혼한 지 10년 동안 후궁도 들이지 않다가 후사를 걱정하는 신하들의 성화가 끊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노국공주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서야 후궁을 들였고 한다
노국공주 외에 다른 여성에게 무관심했던 공민왕은 글씨와 그림의 솜씨가 뛰어나서
공민왕은 사랑하는 아내를 직접 그렸다고 한다
노국공주 역시 남편 못지않게 예술적인 취향이 있어서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예술적인 감수성으로도
소통하는 관계였다고 전한다
공민왕은 고려말의 불안한 정세 와중에서도 가장 주체성있는 왕이라 한다
.
이 용호석은 고려 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공민왕이 이곳까지 왔다가 자신이 죽으면
천내리 뒷산에다 능소를 마련하라고 했고 그 표식으로 용호석을 조성했다고 한다.
용호석이 있는 들판에 인삼밭이 펼처져 있다
노국공주가 인삼을 먹었다면 달라 젔을까.?
노국공주는 공민왕과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했는데
다행히 공민왕 13년에 노국공주가 왕자를 잉태했지만
그녀는 난산으로 인하여 결국 절명했다는것이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