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 문경. 견휀출생지.
572.
* 경북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산 170-1 주위.
신라 진성왕 6년 무진주(현재. 광주)에서 거병한 후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남자가 있다.
그의 묘는 충남 논산에 있고 출생전설이 있는곳이 이곳 경북 상주이다
작은 언덕바위에 세겨진 글씨인데 알아볼수 있는 글씨는 隱(은)과 居(거)만 알아볼수 있다.
자기가 후백제라는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후백제를 멸망시키면서 한시대를 풍미한 창업군주가 견휀이다
여기가 그가 태어 났다는 마을이다.
그는 본인이 나라를 세우고 본인이 스스로 공격하여 멸망하고 마는 왕으로 자식에게 권력을 잃어버린 견훤은
과거에 숙적이었던 고려 왕건에게 귀순하였고, 아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후백제를 고려군의 선봉으로 총공격하였다.
그렇게 하여 자기가 세운 나라를 자기가 멸망시키고
견훤은 등창을 앓다가 후백제가 무너진 다음날인 936년 음력 9월 9일에 사망하였다.
867년에 상주의 농부인 이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현 위치이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본래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나라가 어지러움을 틈타서 지방의 호족으로 성장했다.
견훤의 본래 성씨는 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이(李)씨였으나 훗날 견(甄)씨로 스스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견훤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바구가 전해져 내려온다.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의 비범함을 나타내는 설화를 하나 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 아자개에게 식사를 날라 주기 위해 포대기에 싸인 어린 견훤을
나무 밑에 놓아두었을 때 지나가던 호랑이가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다
삼국유사』 「후백제의 견훤」조에는 견훤이 태어난 출생 설화가 실려 있다.
삼국유사에는 전라도 광주로 지명이 바뀐다
옛날 한 부자가 무진주(지금의 전남 광주) 북촌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매일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로 찾아와 관계를 하고 갑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바늘에 실을 꿰어 그 사람의 옷에다 꽂아놓아라”고 했고 딸은 그대로 했다.
날이 밝자 북쪽 담장 아래에서 풀려나간 실을 찾았는데, 실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꿰여 있었다.
그 뒤 딸이 임신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가 후백제를 세운 견휀이라는 것이다.
전설이 이렇게 되면 그는 이자개의 아들이 아니게 되는것이다.
이번에는 삼국사기에 실린이야기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867년에 태어났다.
본래의 성은 이(李)씨인데 나중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태어난 곳이 상주 가은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상주는 오늘날의 문경과 상주 일대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으로, 가은현은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이다.
가은읍 갈전2리 아차(아채) 마을에도 견훤의 탄생설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아차 마을의 한 부잣집에 규중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밤이면 처녀 방에 잘생긴 초립동이가 나타나서 처녀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는 새벽이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임신해 배가 불러오자 처녀는 부모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는 깜짝 놀라 딸에게 “그 사내가 오거든 보통 때처럼 잠을 자다가
몰래 옷자락에 바늘로 실을 꿰어놓으라”고 일러놓고 밤에 몰래 엿보았다.
밤이 되자 딸의 말대로 이목이 수려한 초립동이가 나타났다가 새벽이 되자 사라졌다.
날이 밝아 실오리를 따라가보니 금하굴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굴속에 들어가보니 놀랍게도 커다란 지렁이 몸에 실이 감겨 있었다.
그 동굴이 이 동굴인 것이다.
역시 삼국사기에 실린 이야기로 보아도 이자개의 아들이 아닌 독립적 출생비화인 것이다.
금하굴앞에는 금하정이라는 작은 한옥이 있는데 후백제의 견휀과는 영관성이 전혀 없는 건물이다.
졸지에 장남에게 배반당해 권좌와 자식을 잃고,
금산사에 유폐당한 견훤은 엄청난 울분을 터뜨렸고, 반드시 빠져나가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결국 유폐된지 3개월만인 935년 6월, 견훤은 막내아들 능예와 딸 견애복,애첩인 고비등과 더불어
금산사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은, 고려군의 영향권에 있던 나주로 향해 고려 조정에 귀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