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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 청도. 내시의 집

한유(閑裕) 2021. 7. 12. 08:01

573.

* 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아이야 이번에는  내시. 즉 고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직위. 내시는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옆에서 심부름이나 잡일을 해 주는 역할이었다.

약간 분업화 되기는 했어도 지금에 와서 보면 청화대 비서실이나

경호실을 비롯한 몆몆부서의 업무를 조각맞추면 관련업무가 내시와 관련이 있다가 아닌지.....

김씨고택으로 안내하는 고마운 이정표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환관들이 내시부를  맡게 되면서 내시가 곧 환관이라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환관들은 고자였기 때문에 내시라는 말에 고자라는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태조   이성계시대에 세자빈 유씨가 내시(고려시대의 개념으로 거세하지 않았다)

이만과 간통한 사건으로 이만은 처형되고 세자빈은 폐출된 것에서 시작되어,

이후부터는 거세한 사람들만 내시가 되게 함으로서 내시와 환관의 차이가 없어졌다.

경상북도 청도군 임당리에 있는 7동짜리 한옥이 그중 하나로 내시들이 말년에 살다가 죽는 

양로원 같은 역할을 하던 장소다.

 

여기 청도 운림고택은 구 한말  내시로서는 최고위직인 상선의 품계를 받은 운림. 김병익의 고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운림고택으로 불리운다. 이고택은 조선 중기부터 400여년을 이어진 내시들의 집인 것이다.

내시들은 환관이 되기 위해 잘라낸 자신의 고환(부랄)을 잘 말린 후 '양물단지'에 보관했다.

죽은 후 고환을 다시 몸에 접합시켜 관에 넣어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시들은 자신의 고환이 담긴 양물단지를 보물처럼 아꼈다고 한다.
성서러운 성행위가 얼마나 인간의 본질인지를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종족보존의 본능도 포함된다.

위 상단건물 4번 건물이 대단한 의미를 가진 건물이다

4번 건물에 있는 출입문이 일종의 대문역활을 한다고 보면 되겠다 앞 가림막 담장옆으로 가람판자가 있는데.............

그것이 아래 사진이다.

하트모양의 구멍이 만들어져 있는데 용도가 분명있다.

내외간의 유별이 강조된 조선의 유교이념은 남녀사이를 인위적으로 멀직히 떨어지게 했다.

夫婦有別(부부유별)..........

안방에 거주하는 여인네의 그 모습이 그리워 사랑방 남자가 이 구멍으로 여인내를 바라보는 용도이기도 하렸다

하지만 내시도 즉 말해서 고자도 결혼을 했고 가족을 거느리고  살았기에

안되는 거시기를 원망하며  안채로 출입하는 사람과 부인을 감시하는 용도가 더 정확하지 않는가.?

여자는 정상적인 기능이 있을것이기에...........

기타건물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듯 하지만 건물들이 안채를 감싸고 있다.

내시와 관계된 사건하나가  있다.

조선 성종때에 내시인 최수연은 왕자인 완원군의 유모와 정을 통하다 발각됐다.

이로 인해 곤장 100대를 맞고 제주의 관노로 발령이 난것이다.

그런데 서득관 사건이 일어나면서 두 사람은 참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이 장면을 공개 처형형식으로 하여 기타 환관들이 보게 했다는 야그이다..

 

다시한번 4번의 중사랑채를 바라보며.........

 

트랜스젠더의 입학거부로 시끄러웠다.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사건은 어찌해석해야 하는가,

나이가 들면 자동적으로 중성화 되는것이 인간이다.

내시가 성불구자로 대체된 이유가 조선조를 연 태조 이성계의 세자 방석의 빈이였던 현빈 유씨 때문이란다

제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사극에서 유씨와 이만은 어릴때 부터  (유씨가 궁에 들어 오기이전)

첬사랑 관계였는데 유씨가 세자빈으로 입궁하자 어찌 어찌하여 궁에 들어왔다

하여 사랑 사단이 발생하여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6월 19일  “내수(內竪, 내시) 이만을 목 베고, 세자의 현빈 유씨를 내쫓았다”

는 기사가 있단다

 

여기는 임당리 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