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567. 화성. 정조능.

한유(閑裕) 2021. 6. 27. 04:48

570.

*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 

 

 세계문화유산을 찾아간다.

 

나는 이 길을 걸어 올라가서.

요절설, 독살설에 의혹을 가지고 개혁군주였든 정조의 묘를 먼저 찾아간다

정조는 매우 다혈질이고 급한 성격인지라 신하들과 갈등이 많았다는데.

그의 릉도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어 있

조선 왕의 특성상 과로는 기본인데다 정조의 경우 각종 스트레스와 잔병치레가 잦았고,

술담배를 즐겼으며, 수 많은 일을 해낸점 등을 고려하면

49살에 죽은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고 한다

당시에는 50세만 되어도 천수를 누렸다며 잘 살았다고 하던 때였고,

60대까지 사는 사람이 전 국민의 5%도 되지 않던 때였다.

무었보다 그는 그 나이에 종기를 심하게 발병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이니 다시 한번 만날것이야.

여주에서 세종대왕 릉과 효종의 왕를을 답사했기에  조선왕릉은 세번쩨이다.

 

여기서 먼저 융릉. 건릉이냐를 두고 어디로 먼저 가야하나로 다시 약간을 고심했지만.

 

건릉으로 먼저 발길이 닿았다

조선조 22대왕을 지낸 영조임금 이산의 릉이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정한 당쟁의 정치판에서 자기 아버지인 영조에 의하여

뒤주속에 갖혀서 죽는 임오하변의 무서운 광경을 보고 어린 정조는

마지막까지 아버지 사도세자를 살려달라고 할아버지 영조에게 애원하는

눈물겨운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영조는 "누가 얘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했느냐. 데리고 나가라"며 쫓아냈다.

사도세자 사후 어머니  헤경궁 홍씨와 함께 외갓집으로 내려가지만

곧 혜경궁 홍씨와도 생이별해 궁으로 돌아간다.

이 때 사도세자의 생모인 할머니 영빈이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하는데

영빈 이씨로서는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그에 대한 죄책감도 겹쳐

손자에게 극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생이별은 오히려 혜경궁 홍씨의 가슴 아픈 결단에 가까웠느며

어린 정조가 생모와 떨어지기 싫어해서 영조가

"그래도 어미를 이토록 그리워하는데 같이 사는게 낫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혜경궁 홍씨는 혹시 정조가 할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한다며

영조가 질투할 할 것을 우려해서 단호하게 정조를 떼어놓았다고 한다.

영조의 우려 수준의 편집증과 그 결과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혜경궁 홍씨의 이러한 처신은 앞날을 내다본 처신인 것이다

절대로 기우가 아니었다.

 

가장 정조의 인물상이라고 하는 초상이다

정조는 세손절에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극진한 총애를 받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한번도 세손을 꾸짖지 않고 칭찬만 할 정도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에게는 정신병(?)에 걸리게 할 정도로 혹독하게 대한 것과는 대조적인데

이런 세손에 대한 편애가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찾지 않아도 원손인 정조는 영조가 심심하면 불러서

글을 쓰게 하고 책을 읽어주거나 읽어보게 하는 등 편애를 했고

결과적으로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부채 의식을 갖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사도세자 능역을 조성하고 정조가 보이는 효심은 병적으로 격렬했는데

11세에 아버지의 충격적인 죽음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역사나 인간세상의 아이러니는 조그마한 사건이나 생각이 큰 변회의 시작점이 될수도 있다.

어떠한 방향으로든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는 측면이 있다.

임오화변 이후 정조는 일부러 흠을 잡는다 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모범적이고

공부를 잘했는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으나

영조의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조의 생존본능 이기도 했다는데.......

 

1762년에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겪자 먼저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에게 입적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부터는 영조왕을 대리청정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1776년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5년간 재위하고  1800년에죽는다

할아버지 영조와 함께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임금으로 평가된다.

파란만장했던 정조의 생애는 후대에도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남겨 KBS 드라마 이산으로

이서진이가 연기한 인물이 정조이다.

 

즉위하면서 한 말이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 후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척신들인 홍인한 정후겸등 정적들을 척결한다

그리고 정조가 글을 읽던 존현각까지 자객을 침투시켰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는데

홍계능, 홍상길, 홍신해, 홍이해 등 남양홍씨들이 집단으로 연루된 모반이 드러나면서

일대 피바람이 불기도 했다.

홍계희 계열은 이미 홍인한이 사사되는 과정에서 타격을 입은 상태였고

이에 반발하여 사건을 일으켰다.

이 존현각 자객 사건은 강용휘 등의 자객들이 존현각의 지붕을 뜯고 잠입하려고

시도하다 발각되기도 했고

강용휘와 전흥문은 무사히 탈출한 뒤 재차 암살 시도를 꾀하여 들어왔다가

홍국영의 강력한 주장으로 삼엄해진 경비에 암살을 포기하고 궐의 뜰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어 사건이 마무리가 된다.

이 사건으로 남양 홍씨의 홍계희 계열이 숙청되고 연루의혹이 있는

자신의 동생인 은전군 이찬을 사사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구에 직면했고

며칠 간 신하들과 대립한 끝에 눈물을 흘리면서 사사했다고 한다.

 

정조가 왕위에 있는동안 반란내지 역모를 꾸민 사건이 많았다

송덕상의 제자라고 자임한문임방이라는 자는강원도에서 병사를 모아서 동대문을 치려다가

처형당했고 문양해라는자는  가상의 신인을 앞세워 사람들을 선동함과 동시에

정조에게 숙청당한 김귀주, 홍국영 쪽 사람들과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

1782년 이유백. 이 택징. 권홍징등의 모반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조 앞에서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지 않고 '나'라고 하며

정조를 쳐 없앨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등 매우 당당한 역적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뎀비는

정적들이 많았다

이러한 암살 위기는 정조에게 결국 자신을 호위할만한 군사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게 하였다.

당시 군영은 대부분 주요 당파에 장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금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당파를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결국 1784년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축하하기 위해 경과를 실시 무과에서

무려 2000명의 합격자를 배출시켰고 이후 홍복영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1785년 장용위를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1788년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개칭하면서 정조는 하나의 자신의 친위 부대를 가지게 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은 가까이서 볼수가 없다.

세종릉. 효종릉. 단종릉.

모두 멀찍하게 떨어진 상태로 관람참배 해야 한다.

 

정조는 이후 1780년에는 심복이던 홍국영을밀어낸다

사실 홍국영이 대놓고 토사구팽당할 짓을 했는데 왕이 자신을 믿고 의지하여

즉위 후에도 최측근으로 두었단 것에 기고만장해서는 나이 지긋한 신하가 와도

버르장머리없이  맞이했다고 한다.

자기 핏줄의 세자를 낳아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누이인 후궁 원빈 홍씨가 일찍죽자

효의왕후를 모함하고 정조의 섭생을 대놓고 반대하는 미친 짓을 했다.

심지어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을 완풍군으로 삼고 자신의 조카라고 선포했는데

멋대로 왕의 조카를 데려와서 왕과 사망한 후궁의 양아들로 만든 것이다.

홍국영은 전횡을 부리다 동료였던 김종수 등이 등을 돌리면서 숙청된다

 

.2009년 2월 발견된 심환지와 교환한 어찰첩을 보면 옹이사용한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학자 군주답지 않고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다.

특히 자유자재로 욕설과 막말로  화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사람 꼴도 못 갖춘 새끼와 경박하고 멍청하여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신이 감히 그 주둥아리를 놀린다.

대신 ○○○는 몸에 동전 구린내가  나 주변이 모두 기피하는 놈이다"

호로자식 "이라든지 하는 말은 물론이고 어전 회의 중에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면 바로 욕설을 구사했다고 한다.

 

 활솜씨도 대단히 훌륭해서 글자 그대로 '백발백중'. 화살 100발을 쏘면, 98발, 50발을 쏘면 49발씩 맞히고,

나머지 한두 발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군주는 스스로의 재주를 자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정조는 곤봉에 놓고 쏘아 10발을 쏘아 모두 명중시키기도 했다.

세손 때 쏘고는 즉위 후 16년간이나 놓았는데도 50발 중 41발을 맞히었고

한 번 49발을 맞힌 이후로는 어김없이 49발을 맞혔다는 기록도 있다.

 

영조는 대단한 술 군이었도 전한다.

근처의 팔달문 시장(남문 시장) 입구 쪽에 보면 정조가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동상이 있다고 하는데.

그 동상에 불취무귀(不醉無歸),

그러니까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상인들이 장사수단으로 세운것이 아닌가 싶다

다만, 이는 진짜로 그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니고, 백성들이 술에 취할 흥취를 즐길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글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