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 완주. 정여립선생.1
422.
* 전북 완주시 상관면 월암리.
병신같은 선조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시기는 16세기 후반이었다.
그는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아버지를 두었고 명종의 조카였다.
명종이 만약 아들을 두었더라면 그는 여느 후궁 출신의 군들과 마찬가지로
별볼일 없는 일개 종친의 겯가지로 푸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15세에 행운을 잡아 왕위에 올랐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재난을 겪어야 했다.
그가 왕노릇을 하는동안 붕당이 일어나고 당쟁이 생기고 옥사도 생기고 반란도 일어난다
조선조 왕들 가운데 처신을 가장 잘못하므로 인하여 적자인 영창대군은 불땐 방안에서 쪄서 죽이는
증살이란 방법으로 고통속에 죽기도 한다
자기의 아들인 광해를 질투한 못난 애비로 끝나지 않고 ..........
야튼 선조 그는 이런저런 당파싸움을 겪다가 1589년(선조 22)에는 급기야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모반사건을 맞는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기축옥사라고 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의 일이다.
정여립은 아들 옥남과 변숭복, 그리고 동모자인 박연령의 아들 춘룡만을 데리고 진안 죽도로 숨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도망한 이들은 며칠을 산속에서 지내며 동네에서 밥을 빌어다가 먹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수상한 이들이 산속에서 숨어 지내며 볏짚 속에서 잠을 잔다고 알려
진안현감 민인백이 관군을 이끌고 와 산을 포위했다.
정여립 일행이 바위 속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한 민인백은 왕명을 전하고 사로잡으려 했다.
이때 정여립선생이 칼을 빼 먼저 변숭복을 친 다음에 아들과 춘룡을 차례로 내리쳤다.
그리고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목을 칼날에 대고 찔렀다.
정여립선생은 죽으면서 황소 울음소리를 냈고 그의 아들은 칼을 빗맞아 살아났다고 한다.
당시 우의정 정언신은 정여립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정여립이 모반할 리가 없다”고
변명한 탓에 쫓겨나 문초를 받을 지경에 있었다.
누구나 정여립과 눈꼽만큼만 관련이 있어도 송강 정철은 사정없이 고문하고 죽여 갔다.
서인들은 이 일에 동인들이 많이 연루되자 정적제거에 반겨했고,동인들은 혹시 불똥이 자기에게 튀지 않을까 벌벌 떨었다.
겁먹은 동인의 일부인사는 살기 위해서 정철을 향해 오히려 더욱 강하게 죄인들을 다루라고
요구할 정도였다니 그 때의 세상은 배신의 시대이고 저만 살자는 시대였다
(충북 진천에 가면 송강의 묘가 있다. 454번 )
그는 선조에게 건의할 때 고개를 들어 눈을 똑바로 뜬 채 따지고 들었다.
한번은 왕이 그의 건의를 거절하자 문밖으로 나서며 눈을 부릅뜨고 왕이 있는 곳을 뒤돌아보았다고 한다.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그가 조정에 있을 때. 선조를 바보나 머저리로 취급했고 때로는 어두운 임금, 등신같은 임금.
부덕한 임금으로 여겼다는 말도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방원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죽인자가 선조이다
정여립선생 생가터를 파서 沼(소)를 만든 이유는 그대로 두면 풀이 나고,그 풀을 말이나 소가 먹으면
반역을 일으키는 병마로 사용될 수 있어 그런 가능성까지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집을 헐어내고
그 터를 숯불로 지진다음 땅을 파헤쳐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