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보성. 최대성장군.
321.
* 전남 보성군 득량면 충의로 1651
방진관에서 이순신장군과 최대성 장군이 만나는 장면의 벽그림이다.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을 새우고 전사한 ‘모의(慕義) 최대성(崔大晟) 장군의 충절사를 우여곡절끝에 찾았다.
모의장군 최대성 공은 서기 1553년(명종8년) 3월 7일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에서 출생,
33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 첨정, 부정, 훈련원정에 올랐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막하에서 한산대첩 부산포 해전을 비롯한 거제, 옥포, 당항포, 함포,
웅포, 안골포 등 수많은 대소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야 말할것도 없지만 그의 휘하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고군분투한 장군과 장졸의 공도 헤아려야 하는것도 중요하다.
최재성장군........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아들(언립, 후립), 동생(대민, 대영)과 사노 두리, 갑술 등 가족과
친지를 비롯한 수천명의 의병을 모아서 남해안 일대 해전에서 20여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기도 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대양(大洋). 전라남도 보성 출신. 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과
대사성 최해(崔瀣)의 후손이고, 만사정(曼思亭)최윤지(崔潤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최계전(崔繼田)이고, 아버지는 첨정(僉正) 최한손(崔漢孫)이며,
어머니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이유정(李有廷)의 딸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천성이 강개(慷慨)했다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도 일찍이 깨우쳤으며
무예가 남달리 뛰어나 1585년(선조 18)에 드디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벼슬을 거쳐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훈련원정의 신분으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한후장(捍後將)이 되어 거제·옥포·한산·합포·마산포·가덕도·
당항포·웅포 해전 등 남해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그 뒤 1597년 정유재란 때 조선의 관군마저도 무너진 상태에서 의병을 결성하기 위해
아들 최언립(崔彦立)·최후립(崔厚立)과 심지어 가노(家奴)까지 총동원하는 비장한 각오로
의병 수천 여명을 모아 모의장군(募義將軍)이란 기치(旗幟)를 달고 의병장으로 나섰다.
특히 순천·광양·고흥·보성 등 20여 곳에서 송대립(宋大立)·전방삭(全方朔)·김덕방(金德邦)·
황원복(黃元福) 등과 크고 작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으로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이듬 해 6월 전라남도 보성의 안치전투(鴈峙戰鬪)에서 적을 추적하던 중
적의 유탄을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는것이 백과사전이 전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