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361. 아산. 공세리성당

한유(閑裕) 2018. 6. 12. 04:58

361.

*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겨울이었다

겨울이라지만 본시 빼어난 풍경이라서 아산땅에 있는 공세리 성당은 성당이 위치해 있는 둔덕위로만  보아도 멋있는 풍경이다.

나목으로 변한 공세리 성당의 풍경은  분명 겨울이지만  겨울의 관점으로 볼수 없는 따스함이 있는 성당이다

공세리 성당의 사계를 두고 보면 손님이 적은 시기가 겨울이라지만 공세리의 성당은

그래도 사람들의 발길로 외롭지가 않다

공세리 성당......

주위에는 아산만으로 삽교천이 흐른다............. 공세리에 입성한다.

큰 절앞에 가면 그 절집으로 오는 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또는 호주머니를 노리는 상가들이 있듯이 이름난 천주교 성당이라서 그런가.?

공세리성당덕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이름난 성당이니 이름난 절집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의 가게가 보인다.

충청에는 유달리 천주교와 관련된 유적 내지 사적지가 많다.

이곳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아산, 서산, 한산을 비롯하여 청주, 옥천 등

39개 고을의 조세를 조운선을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던 공세창고지가 있던 곳이다.

아이야. 비가 서있는 이곳은 수로와 육지교통의 요지로서 조선시대에는

세금이나 공물을 저장하여 한양으로 보낸 공진창이 있던 곳이다

공세리 마을에는 이런 그림도 있다. 의용 소방대를 벽화로 그려 놓았다.

 

공세리에는 요런 광고 그림도 있다.

흑갈색경고제(고약)와 담황갈색의 경고제(발근고)로 매일 1회 환부(질환 부위)의 크기에 따라

고약을 붙이되 곪기 전에는 고약을 환부(질환 부위)의 2배 정도로 늘려서 매일 1회 갈아 붙이고,

곪은 후에는 먼저 발근고를 녹두알 크기로 떼어 환부(질환 부위)중심에 붙이고,

그 위에 고약을 환부(질환 부위)의 2배로 늘려서 매일 1회 갈아 붙인다는 이명래고약.

내 나이쯤 되면 한번쯤은 이용해본 그 고약...... 추억의 고약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육군대좌 사사키라는 늠이 발찌를 치료한뒤

이명래고약집에서 세번 놀랐다.

첫째는 너무 불결했고 둘째는 치료비가 매우 쌌다.

셋째는 아주 잘 낫는다는 점이다라고 시부렁거렸다는 이명래고약..

  이명래고약은 충남 아산의 공세리성당에서 탄생했다.

이명래는 1890년 서울에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9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생활고 등의 이유로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로 이주하여, 드비즈신부에 몸을 의탁했다.

잔 심부름을 하며 고약제조법과 치료법을 배워나간 이명래는 거지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개발한 고약의 효능을 실험하고 개선했다.

이명래는 오늘날에도 난치병으로 꼽히는 골수염 결핵성임파선염

관절염 만성호흡질환은 물론 온갖 종기에 효험이 뛰어난 처방을 개발했다.

고약은 많은 처방중 하나인데 화상 피부병 종기 관절염 항아리손님 볼거리 관절염 유선염 등

질병에 따라 처방하는 고약도 다르다

공세리를 떠난 이명래는 1920년 서울로 올라와 중림동에 고약집을 차렸다.

  

일본인에게는 절대로 면허를 받지 않겠다고 작정한 이명래는

미군정 시대에 비로소 의생면허증을 취득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툭하면 위생검사에 걸렸고 그 때마다

벌금을 내거나 뒷돈을 주어 무마했다고 한다.

1944년 일제의 강제소개에 따라 평택 서정리의 친척집으로 옮긴 그는

광복 후 서울 애오개에 다시 고약집을 냈다. 지금의 종근당 자리였다.

1ㆍ4후퇴 때 서정리로 내려간 이명래는 52년 1월 술에 취해 잠에 든 뒤 세상을 떠난다.

여름 같으면 숲에 가려저서 보이지 않을것 같다.

 

교육관일듯 싶은 건물에 예수님상이 있다.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어린 시절의 예수님상이렸다

본당앞으로 올라섰다.

 

둘러본다.

 

 

공세리 성당이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