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367. 아산. 풍운아 김옥균

한유(閑裕) 2018. 6. 13. 03:26

367.

*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는 것. 즉 움직이는 모든 것은 항상 그렇지 않고 소멸한다는 이치를 담은 말이

제행이 무상하다는 뜻이다..

아줌마가 한가롭게 걸어오는 뒷배경이 여민루이다.

아산땅의 중심 아산관아가 있던곳으로 토정 이지함선생께서도 근무하였기에

그분의 발자취도 어디엔가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마을이었다여민루는

아산현의 문루로 지어졌던 건물로서 현재 영인초등학교의 담장에 붙어 있다.

1411년(태종 11)에 현감 최안정(崔安正)이 현감으로 근무할 당시 진주하씨인 영의정 하륜(河崙)의 권유로

정이오(鄭以吾)가 루(樓)의 기문(記文)을 썼으며,

누의 이름은 하륜의 “백성을 위하는 뜻을 취하여 여민(慮民)이라 이름하여 지었다는 여민루이다

 

정면 세칸짜리 루이고 건물 우측은 학교이다

백성을 위하는 뜻을 취한다는 여민루..........

요사히 정치인들은 말로만 민의를 수용한다고는 한다.

서울시에 서울리가 없고 부산시에 부산리가 없고 광주시에 광주리가 없는데

아산시에는 아산리가 있다.

고요한 아산리의 풍경이다.

나는 그야말로 풍운아로서의 대명사가된 김옥균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찾아가는 길의 길목에서 잠시 주변을 둘러 보았다.

반촌은 다 그러하듯이 큰길에서 골목길로 접어들면 그나마의 소음조차 사라지고 고요만 있다.

아이야. 아산의 아산리도 그러하였다.

믄가가 자리잡고 있다.

올라가 본다.

김옥균 선생의 무덤이다

그가 역적이내 마내해도 그는 한시대를 살다가면서  족적을 뚜렸이 남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도 제행무상이다.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으리.

 

거사 당일인 10월 17일 저녁 7시 우정국개국축하만찬회가 우정국청사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우정국 총판(總辦) 홍영식, 박영효, 독판(督辦) 김홍집(金弘集),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 우영사(右營使) 민영익(閔泳翊) 등 개화당과

사대당 인물들, 그리고 주한외교사절들이 참석하였다.

경비가 심하여 안국동 별궁에 대한 방화는 계획대로 시행하지 못하였으나,

대신 10시경 우정국 북쪽에 있는 민가를 방화함으로써 거사에 돌입하였다.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갔던 3영사 중 민영익이

개화당 행동대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우정국 내에 들어와 바닥에 쓰러졌다.

그 뒤 수라장이 된 연회장을 빠져나간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徐光範) 등

개화당 인물들은 일본공사관에 들렀다가,

곧바로 창덕궁에 들어가서 계획대로 국왕을 경우궁으로 모셔가

정권을 장악하고, 다음날인 18일 새 정부의 구성을, 19일에는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서막이다.


그 중심에 김옥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옥균은 충남 공주 정안의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병태(金炳台)는 시골에서 헛기침정도하는 양반 후예로

겨우 생활을 꾸려나가는 처지였다.

김옥균의 가계는 김상용(金尙容)을 중시조로 꼽는다.

김상용은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했고,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金尙憲)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청나라와 싸우기를 주장한 척화파의 거두였다.

김상용의 아들 김광현(金光炫)은 이조참의를 지냈지만

그 후예는 겨우 양반의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충청도 일대에서 살았다.

그 김상용의 후예가 김옥균이다 

이와 달리 김상헌의 후예는 문벌세도정치를 주도하여 서울에서 큰 세력을 잡고 흔들었다.

김옥균은 여섯살 적에 종숙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갔고,

이로 인해 서울에 와서 살았다.

김병태가 장자인 김옥균을 선뜻 양자로 내준 것은 살림이 쪼들리기도 해서였지만

김병기가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므로 아들을 출세시켜보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김옥균이 열한 살 때에 김병기가 강릉부사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그도 강릉에 가서 살다가 열여섯 살에 돌아왔다.

서울대 출신도 아닌데도 김옥균은 스물둘에 문과에 장원급제했을 정도로 머리가 뛰어났다는 야그이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천재였다.

1881년 김옥균은 서른 살의 나이로 일본 시찰길을 떠났고,

이어 1882, 1883년 등 3차에 걸쳐 일본을 돌아보며 일본의 문물을 알아보기도 하고

그곳에 가 있는 신진인사들과 교유하기도 했으며 국가제도의 개선을 위해 차관을 끌어오기도 했다.

그동안 그는 교섭통상의 책임자, 동남아 제도의 개척사겸포경사, 호조참의 등의 자리를 얻었다.

그는 나라의 부강을 위해 동해의 고래를 잡아야 한다고 역설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또 한성순보에〈치도약론(治道略論)〉을 발표해 도로의 개수, 위생시설과 제도의 개선을 주장했다.

이와 함께 치도국과 우정국의 설치, 농사시험장 · 농업학교 · 순경부(巡警部) 등의

설치를 추진하여 제도의 개혁을 통해 개화정책 또는

근대화정책을 추진하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수구파의 반대가 거셌고 봉건잔재를 불식하기에는

이런 온건한 제도의 개혁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갑신정변을 계획한 것이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그는 많은 세력을 끌어들였고,

일본군대의 지원까지 얻었으나 끝내 실패로 끝나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이 묘. 하단부분이다.

부인은 포항근처에 있는 기계.

그러니까 본향을 기계에 둔 기계유씨가 본 마누라이다.

일본인 여자를 부인으로 두고 자식까지 있지만 정경부인만 비문에 올라간다.

조사해본바에 의하면 생부 김병태는 즉시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옥사하고,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대구 감영에 투옥되었다가 옥사하였다.

생모 송씨와 여동생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아내 유씨부인은 7세된 딸과 함께 노비로 분배된다.

살아남은 그의 첩 송씨는 옥중에서도 음행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島)에 유배된 데 이어

1888년 8월~1890년 4월 홋카이도에 연금을 당한다.

그는 이 무렵 두 명의 일본인 게이샤와 연인관계였는데,

이들 게이샤들은 김옥균이 자주 출입하던 술집에서 만나게 되어

그의 금전적, 정신적 후견인이자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당시 김옥균의 후원자였던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의 저서

‘33년의 꿈’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1894년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가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 후 도쿄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참석했다.

미야자키가 장례식장 한구석에서 슬피 우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자

“나는 여인의 몸. 선인(先人·김옥균)의 사상은 모르지만, 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했단다.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상하이로 건너간 뒤에도 김옥균을 위해

따로 밥상을 차려놓고 그의 무사귀환을 위해 불공을 올리다가 암살된것을 안다.

김옥균에게는 또다른 일본인 여자가 있었는데 역시 다른 술집에서 만난

게이샤인 마츠노 나카(松野なか)였다.

마츠노 나카에게서는 딸 1명이 태어났는데 이름은 사다라고 전한다.

김옥균 그의 일생은 알면 알수록 그야말로 바람과 꿈속을 살아낸 인간사였다

제행이 무상한것을 과연 그는 모르는 풍운아였을껀가.

 

유허지에서 내려와서 찍은 사진들을 살펴보며 

곰탕한그릇으로 끼니를 떼우고 길을 떠났다.

아이야. 아이러니하게도 이름이 조선곰탕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