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186. 보성. 대원사에서.

한유(閑裕) 2018. 4. 29. 05:23

186.

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833-5 대원사.

 

 

내가 절을 찾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부처란 무었일까.?

잘만하면 성불할수 있다고 했으니까 부처가 될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절간에 가면 잿빛 몸뻬바지를 입고 있는 여인들을 우리는 보살이라 한다

보리살타의 준말인 보살은 부처가 되기전의 ‘깨달음을 구해서 수도하는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닌가.?

스님들도 아지매들에게 보살님. 지나가는 객도 보살님 보살님이라 한다.

몸빼바지만 입고 있으면 모두가 보살소리를 듣는게 현실이다.

이 보살 중에는 중생을 교화하여 구제하겠다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대원(大願)을 발하여

부처가 될 권리를 유보하고 윤회의 세계에 머물러 구제(救濟)에 나서고 있는 보살도 있다.

누구든지 성불(成佛)하겠다는 서원을 일으켜서 보살의 길로 나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이며, 장차 성불할 수 있다는 ‘범부보살사상(凡夫菩薩思想)’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보살사상은 공사상(空思想)과 결합하여 대승불교의 근간을 이루었다.

대승의 보살사상 중 기본적인 두 개념은 서원(誓願)과 회향(回向)이다.

그것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이며,

자기가 쌓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남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회향이다.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머물 것을 자원하여 일체의 중생을 먼저 깨달음의 세계(彼岸)에 도달하게 하는

뱃사공과 같은 자라고 설명되고 있다.

자비(慈悲)와 절복(折伏)의 신앙대상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반야경계통의 문수보살(文殊菩薩), 화엄경계통의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성립되고

계속하여 지장보살(地藏菩薩) 등 수많은 보살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보살은 또 실재하였던 고승(高僧)이나 대학자에 대한 일종의 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인도의 용수(龍樹)·마명(馬鳴)·무착(無着)·세친(世親) 등이 보살로 불렸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원효(元曉)가 보살의 칭호를 받았다.

나아가 요즈음에는 재가(在家)·출가(出家)를 막론하고 모든 불교도들에게 확대되었다.

 

 

 

처사(處士) - 중국에서 생겨난 호칭으로, 도덕과 학문이 뛰어나면서도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황제나 왕이 내리는 시호였다

 

 

 

 

 

 

 

 

 

 

 

 

                                         

특이한 불상도 있었다

 

 

오해할 소지가 많았다만 

 

 

 

대원사부속 티벳박물관에 모셔진 불상들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지느니라.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 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 촉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집멸도 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