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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여수. 진남관.

한유(閑裕) 2018. 5. 24. 06:43

305.

* 전라남도 여수시 동문로 11

진남관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 지휘소로 삼았던 진해루 터 자리에 세운

수군의 중심 기지가 진남관이다.

임진왜란 종료 이듬해인 이순신의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75칸의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진남관(鎭南館)이라고 이름 지었다.

진남관은 일제강점기 때는 여수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진남관은 2001년 4월 17일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의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객사인데 중앙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비와 궐패를 모셔놓아

관아의 수령이 초하루 보름에 또는 나라의 큰일이 있을때는  향궐 방배했단다

 

 

조선왕조의 왕들 중에서 가장 등신이고 비열하고 비겁하면서 쪼다 멍청이이면서

수많은 백성을 죽이고 신료를 죽인 살인자가 선조 이연(昖)이다

계급은 왕인데 천민보다도 더 비굴한 짓꺼리를 한  왕이니 

조사할수록 존경심은 커녕 증오심을 유발하게하는 가장 부끄러운 선조이더라 

 

 

재위기간 동안 사림정치(士林政治)가 확립되고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초명은 균(鈞), 개명은 공(昖).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1567년 명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즉위했다.

그가 왕으로서 해야할 일들은 역대 왕보다도 특출한것은 없는데 나라말아먹는 일들은 수없이도 했다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척신정치하에서 성장한

구세력의 제거를 둘러싸고 전배(前輩)와 후배(後輩)가 대립하게 되었다.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동인으로 붕당이 조성된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朴淳)·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이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유성룡(柳成龍)· 이산해(李山海) 등이었으며,

각각 이이와 이황의 학문적 영향으로 편이 갈리게 되는데

이이와 이황은 한국 종이돈 모델이기도 하다.

조작되었다고도 하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세력은

1000명이나 되는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만.

1591년에는 세자책봉문제로 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파는 南人으로, 강경파는 北人으로 다시 나누어졌다.

그뒤 선조대의 정국은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다

 

 

 

 

 

 

 

 

 

전라좌수영의 동쪽 소포(지금의 종포)에서 건너편 돌산도까지 쇠사슬을 걸쳐 매어

적선의 야간 통행을 막은 시설이라는 설명이 있다.

설치 방법을 보면 먼저 긴 쇠사슬의 중간 중간에 큰 나무를 꿰어 부표 구실을 하게 하고

쇠사슬을 바다에 가로질러 설치한 후 이것이 조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물속에 큰 돌을 달아매어 닻의 구실을 하게 했다.

 

 

 

 

 

 

 

 

 

 

 

 

 

 

 

무쇠로 만든 비석도 있다

 

 

 

 

 

 

 

 

 

진남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