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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 옥천. 우암 송시열유허지

한유(閑裕) 2018. 6. 7. 06:03

339.

*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구룡리)134-2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갑조이고,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거 정계에 진출해 산당(山黨)이라는 세력을 형성했던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윤선거(尹宣擧)· 등과 함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26세 때까지 외가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살다가 회덕(懷德)으로 옮겼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발을 내디뎠다. 

 

구룡리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송시열의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또는 화양동주(華陽洞主)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김장쟁(金長生)·김집(金集)을 이어

기호학파를 이끌면서 서인·노론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1607년 11월 12일 구룡촌(九龍村)에서 출생하였다.

여덟살 때부터 친척인 송이창(宋爾昌)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 때 그 아들 송준길(宋浚吉)과 같이 공부하면서 이후

평생동안 학문과 정치생활에서 함께 고락을 나누었다.

 

구룡리 마을전경.

이곳에서 우암 송시열선생이 태어 났다고 한다.

 

 

향리에 묻혀 지냈으나,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막후에서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곧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올랐지만

우암 송시열의 실재 벼슬기간은 전체를 통털어 그리 길지 않았지만 제자를 통한 막후정치의 대가였다.

 

 

 

 

 

1682년(숙종 8)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만  결국 주자의 신봉자로 주자의 충실한 교도로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를 공자. 맹자. 주자를 연결하여 송자라 하기도 한다.

무식한 내가 보기에 주자학은 밥먹고 사는것하고는 하등 연결고리가 없는 학문이 아닌가 싶다.

 

1689년 숙의장씨(장희빈)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막강한 막후정치의 대가를 숙종이 사사한다

 

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옥천 지방에서 출생한 조선의 대유학자이다.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 인조 대 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기도 하였다.

비는 현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직사각형 비몸을 올리고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갖춘 모습이다.

비몸 앞면에는 '우암송선생유허'라는 비명칭을 해서체로 새겨 놓았고,

뒷면에는 '숭정후삼술이월일'이라 새겨 건립연대를 밝히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조선 정조 년간(재위 1776∼1800) 즈음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