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공주. 무령왕릉
278.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고분군
지금의 일본왕이 2001년 생일 회견 때
"내 개인으로서는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쓰여있다
그래서 한국과의 연을 느끼고 있다"
입헌군주국인 일본왕인 아키히토의 마누라는 미치꼬이고
아들은 후미히토 딸은 구로다 사야꼬이다
일제 강점기시에 발발한 대동아전쟁의 장본인 히로히토의 아들이다
지금의 일본왕인 아키히토 그가 말한 왕이 무령이라면
내가 이 왕릉을 방문한것이 의미가 있다
무령왕은 이듬해 1월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해 저항을 꾀하던 백가를 토벌했다.
한편, 512년 상차리(上哆唎)·하차리(下哆唎)·사타(娑陀)·모루(牟婁) 등 네 현을 합병했다고 하는데,
이는 섬진강 유역의 어느 곳이거나 가야 지역으로 짐작된다.
513년과 516년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각기 왜국에 보내 문화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523년 5월 7일 62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 2년 뒤인 525년 8월 12일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무령(武寧)이다.
고구려의 정복군주가 광개토태왕이라면
백제의 정복군주는 바로 마한을 백제에 복속시킨 근초고왕이다.
고대 중국 문헌들을 보면 백제는 쥐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골칫거리 국가로 묘사되어 있으며, 대륙백제가 멸망했을 때 썩은 이 빠진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백제의 시조는 온조로 인식되고 있는데, 고대 중국문헌과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종합해 보면 백제는 중국대륙의 비류백제와 한반도의 온조백제가 통합하여 강력한 해상제국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형 비류와 동생 온조는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의 두 아들이지만, 혈통적으로 따지면 비류는 소서노와 부여계 소태의 아들이며, 온조는 고주몽과 소서노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사진자료가 증명하듯이 1996년 10월 중순 중국 허난성(하남성) 수도 정주에
버스 노정을 알리는 차창 간판에는 고대 백제와 한문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 ‘백제’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그러한 흔적은 고대 백제가 중국대륙에 진출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황하강 남쪽 하남(河南)의 숭산에서 만난 「백제」라는 단어. 그 옛날 온조 백제인들은
한강 이남의 땅을 역시 「하남」이라고 불렀고, 그 왕성을 「하남 위례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국 하남 위례성 인근에는 중국의 숭산과 똑같은 한자 이름을 가진 숭산도 있다.
삼국사기는 백제 개로왕 21년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사람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다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했다.(한)강 따라 둑을 쌓아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닿게 하였다
풍납토성내 궁터발굴현장. 2008년 3월부터 그 동안 발굴비용과 지역민들과의 충돌문제로 중지된 발굴작업이 국립 문화재 연구소와 한신대 발굴팀에 의해 재개된다.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발견당시 국가의 수도성이 아니라, 개인의 성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밝혔으나, 수도성에 버금가는 엄청난 유물들과 유적지들이 발굴됨으로써 초기 온조백제의 수도성임이 드러났다.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일으킨 백제인 흑치상지는 필리핀에서 태어난 22담로 중 한 가문 출신으로 밝혀졌다. 중국에 거대한 백제세력이 있었다는 증거다.
베트남 인접지역인 광서성(廣西省) 장족자치구(壯族自治區) 일대에는 백제향(百濟鄕)」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에서 전남지방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 서낭당 문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광서 장족 자치구(광서성) 성도 (省都)인 남녕(南寧)시와
백제향(鄕) 사이를 오가는 버스도 있다. 역사가 남긴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