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313. 청주. 송상현 묘역.

한유(閑裕) 2018. 5. 29. 06:42

313.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부산 양정광장에 동상으로 서 계시는 분이다.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66호. 송상현(1551∼1592) 장군의 충렬사를 찾았다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91년부터 동래부사로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민과 더불어 혈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마지막으로 부친에게 글을 남기고 장렬히 순국하였다.

한편 그의 충절과 인품는 적장(敵將)도 탄복하여 동문(東門) 밖에 장사하고 입목(立木)을 세웠다.

 

그 분을 모시는 사당과 묘를 찾았더라

 

 

 

 

영정은 가려져 있어서 뵙지 못하였다.

비록 영정을 뵙지 못하고 뒤돌아 내려 왔지만 나는 불쑥 한 생각이 났다

내가 이 만큼이나 전국을 배회하다시피 유랑하고 무사히 유람하게 하는것은 

옛 성현이나 위대한 인물들께의 보살핌이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었다.

찾아가고 또 알게 모르게 참배하고 고개숙이니 나의 여행길을 돌봐 주시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1551년 2월 12일 출생하시어 1592년 5월 25일 전사하신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멍청한 선조 재위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음력 4월 14일에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이어 동래에 쳐들어온 왜병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 하자

이때 부사인 그는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했다.

결국 고니시 유기나가의 군과 혈전을 벌이다가 패전하고 살해 되었더라

왜적은 그를 포로로 사로잡아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자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자는 덕구. 호는 천곡이며 시호는 충렬이고. 본관은 여산 송씨이다.

 

 

 

 

 

묘소는 본래 부산 동래에 있던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지금 위치인 충렬사(忠烈祠) 뒷산으로 옮겼다.

묘역은 200평 정도로 상석· 문인석· 장명등· 묘비 등이 있다.

 

신도비는 묘소로부터 약 250m 아래 진입로 옆에 있다.

1659년(효종 10)에 세운 것으로 방형 대석 위에 높이 280㎝, 폭90㎝, 두께26㎝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얹었다. 1980년에 보호각을 세웠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제전(題篆)은 이정영(李正英)의 글씨이다.

 

198계단이었다고 기억한다

 

 

충렬공 천곡 송선생지묘

 

중앙에 있는 봉분이 송상현공의 묘소이다.

 

 

옛날 기록 사진에 의하면 두명의 부인묘가 합장되어 있는걸로 접했는데 내가 갔을 때는

아래 사진사진의 묘가 따로 분리되어 조성되었었다.

열녀이소사량녀지묘.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북쪽의 임금께 절을 올린 후 성문의 누각에 단정히 앉은채 왜병에게 피살되었다.

적장이 그의 충절에 탄복하여 송상현을 살해한 자기 부하를 잡아 죽이고,

일본장수인 소 요시토시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 지내 주었다 한다.

그의 첩인 금섬도 그를 따라 순절하였다고 하는데 아마 이묘가 아닌가 한다

열녀한소김蟾(뚜꺼비 섬)지묘. 라 쓰 있다 

그 당시의 양반네는 본부인 말고도 妾(첩)이 있는것이 불법이 아니라고 보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