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보고知고.

264. 장수. 논개묘.

한유(閑裕) 2018. 5. 19. 00:05

264.

* 경상난도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540번지

 

아이야. 언젠가 겨울.........

진주성을 나와서 부터 그녀를 직접 만나고 말것이라는 각오를 했다

19살의 꽃다운 여인을 만나는데 어이 봄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었겠나

꼭 그래서 봄을 기다린것은 아니지만

한 낭인은 봄속으로 걸어 나온 것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마음은 가시지 않는것은

체질탓만 아닐꺼라는 생각을 하였지만

꽃이 피고 아지랑이가 피어나니 봄은 봄인가 한다

 제 아무리 이쁘게 피어도 화무십일홍이 아니더냐

덧없는 시절인연이 아니더냐

만남과 이별이 어디 마음대로 이루어지고 흩어짐인가.

 

길 떠나면 나그네인게지

나그네는

전라도와 경상을 구분짓는 육십령 아래에 있는 서상이란 마을을 결국은 찾았다

 

서상에서 논개묘로 가는 길목이다

잠시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조금 후에는 논개를 만난다는 생각에 흥분을 했다

 

논개.......

사람들은

진주 촉석루의 의암아래 흐르는 강물에서 건저낸 시신을 남강의 물결위에 태우고

경호강 물줄기를 거슬러 고향인 장수까지 운구를 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의 교통수단이라는것이 지금처럼 한시간이면 갈수 있는것이 아니니

달구지에 싣기도 하고 지게에다 지고도 갔을 것이다

 

드디어 논개의 시신은 경남 함양군 서상까지는 왔는데....

아깝다 말을 다해 무었해.

젊디 젊은 논개의 시신은 이미 부패상태로 들어가니.........

야튼. 더이상 운구하는것을 멈추고 말았다

운구하는 사람들은 육십령고개를 넘어 고향마을로 가는것을 포기할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논개의 시신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고향마을에서 멈추었다 

전라북도 장수군 주촌으로 가는것을 포기하고 방지리(금당리)에다 안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개울이 흘러 남강에 이른단다.

가는길에서 만난 표지로 보아 방지산에 무덤이 있을꺼라 생각......

논개묘로 가는 도중에 만난 표지판인데 논개묘가 있는 뒷산인듯 했다

이정표가 보인다 꺽어도니 약간 멀리에 나타나는것이....바로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것이 논개묘이다 

먼저 예를 차리는것이 우선이다 싶어 의암사로 갔다

 

그러나 문이 잠겨져 있어서 내부로 들어갈수가 없었기에

해서.... 찢어진 문살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니 그냥 궁금해서 들여다 보니

순간 나는 놀랬었었다

어두컴컴한 사당내에 있는 한여인네와 눈이 마주첬다

진주에서 만난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논개였다

 

안녕하세요

논개아가씨. 논개님. 논개아씨. 논개할머니......

그냥 논개씨......아니 논개 아줌마.?

논개여사님........ 딱히 호칭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두어걸음 물러서서 묵례로 인사를 하였다

신위가 문틈으로 보인다

정면계단으로 올라가지 않고 측면으로 발길을 옮겨 논개묘로 올라간다

아.! 드디어 논개의 무덤앞에 섯다

주촌생가와 진주남강 그리고 여기 서상까지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임을 느꼈다

 

의암신안주씨지묘라는 글이 보인다

논개의 묘가 틀림없는가 보다

뒤에있는 묘가 최경회 장군의 묘인데 논개묘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모든 묘는 배산임수형태이고 양택 또한 배산임수를 따르고 있다

배산임수한 지형은 이미 조선시대에 사람이 살기에 이상적인 터라고 언급되었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아계유고(鵝溪遺稿)』에서 팔선대(八仙臺) 인근 서촌(西村)의 “민가가

서로 마주하고 있는데 모두 배산임수하고 있으며

샘이 달고 땅이 기름지고 수목이 울창하고 곡식이 무성하여 매우 좋다고 하였다.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치생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지리를 가려야 한다.

지리는 물과 땅이 아울러 통하는 곳을 최고로 삼는다.

그러므로 뒤에 산이 있고 앞에 물이 있으면 곧 훌륭한 곳이 된다라며

배산면호(背山面湖)한 터를 말한 것이나,

정조(正祖)도 “옛말에 일백 가구의 마을과 열 집의 저자라도 반드시

산을 의지하고 시내를 끼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라고 하며

의산대계(依山帶溪)한 터를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배산임수한 터는 풍수와 깊은 관계가 있다.

풍수에서 말하는 좋은 터는 뒷산에서 흘러들어온 기(氣)가 모인 곳이다.

기는 물을 만나면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한 곳으로 모이는데,

이를 두고 중국동진(東晋)의 곽박(郭璞, 276∼324)이 찬하였다고 하는 『장서(葬書)』에

“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경계로 하면 멈춘다.

옛 사람이 기를 모아 흩어지지 않게 하고, 기가 다니게 하다가 멈추고자 하여 이를 풍수라 불렀다.

배산임수한 터에 건물을 앉힐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건물의 좌향(坐向)

잡기와 안대(案對)의 선택이다.

좌향 잡기는 터에 건물을 어떻게 앉힐 것인가를 살펴 결정하는 일을 말한다.

좌향의 ‘좌’는 터에 건물이 앉는 방위를 말하고,

‘향’은 건물이 앞을 내다보는 방향을 이른다.

건물이 잘 앉혀지면 그 터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향은 집 앞으로 바라보이는 산인 안대와 관계된다.

건물의 향을 정할 때는 안대의 선택을 우선으로 한다.

같은 마을에 있는 집들이라도, 안대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 집들은 향을 달리 한다.

안대의 형상은 바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심상을 좌우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배산임수한 국면을 경관과 외부공간을 구성하는 관점에서 보면,

터 뒤를 받치는 주산(主山), 소조산(少祖山), 조산(祖山)은 산 뒤에 산이 있는 형상을 이루며

겹겹으로 터를 둘러쌈으로써 터를 받치는 경관이 깊이감이 있도록 한다.

터 앞으로 흐르는 시내 건너 평활하게 트인 전경(前景)은 그 방향의 안산(案山),

조산(朝山)이 터의 대경(對景), 차경(借景)이 되도록 해서

터 앞으로 멀리 내다보는 원경의 중심을 형성하도록 한다.

배산임수한다는 것은 마을이나 건물이 들어선 터가 그러하다는 뜻이지만,

그러한 터에 살거나 생활하는 사람도 배산임수하게 된다.

터와 사람이 함께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며 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는 터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묶여 있음을 뜻한다.

 

논개묘역에서 좌향에 대해  살펴보았더라.

논개에게는 후생이 없는고로 방계후손이 정성을 다한것으로 보인다

논개는 후손이 없다 최경회 나이 60이고 논개 나이 사망년도가19세가 아닌가.

묘의 배치가 특이한것은 논개의 음택뒤에 최경회 장군의 묘가 자리해 있었고

묘의 크기가 논개묘에 비해 작았다

최경회 장군의 본관이 해주 최씨이란것을 알게된다

 

 

 

 

논개묘에서 내려다본 앞의 풍경들이다

 

남강......

아직은 개울의 모습을 하고 흐르지만

진주 촉석루앞으로 큰물이 되어 흐를것이다

다음은 어디로 가야하나를 생각하며 지도를 펼치고 있었다